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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는 빨치산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영예를 회복하고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입니다.’ 합평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국회 청왼 준비작업의 실무릎 맡고 있는 정냥진써 (52- 유족)는 ‘감은 대규 모 양민학살 사건이면서도 거 창사건은 민자당에 의 해 ‘관련자의 명예회복과 배상에‘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이 검토되고 있는 마당에 함명사건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유족 스스로가 나섰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코 어떤 배상올 바라지 않고 순수 ’민간 차원에서 억올한 죽음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것. 당시의 사망자 유가족들은 최근 유족 대표들로 구성된 ‘합평 양민학살사건 유가족모임’을 결성하 고 사망자 파악과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둥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족회구성진상조사 6~25 전쟁이 끝난지 4û년이:넘도복 합평 원야·해 보·나산연 주민들의 가슴에 한으로 난아 있는 ‘함평 양민학삽 사건.은 지균부터 꼭 43년 전인 1950년 11 원로 거슬ëi 올라간다. 당시의 국내 상황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욱이 수 복¥! 뒤 되로릎 차단 당한 공산군플이 산속으쿄 숨 어뜰어 그 지역 꽉익계 주낀한과 함께 빨치산 환동윤 벌이고 있을 때였다. 특히 합평과 영광의 군계를 이 루는 불갑산은 지리산 다음가는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면서 합평군 일원에서는 그틀과 국군 사이의 교전 이 자주 벌어겼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만손닙. 으로 불라는 빨치산틀이 마윤블 점령하는 나날이 계 속됐다. 합평 양민학살사건도바로이감은 상황에서 빚어 진 비극. 당시 5사단 æ연대 5증대(중대장 권준옥)는 윌야·해보·나산올 잇는 교통요지 문장에 중대본부 (해보 신협 건너면 그룻백화점 자리)를 설치하고 이 지역 일대를 장악했다. ‘음력 10월 말께 지금의 월야고퉁학교 뒤편 평촌교 (초다랴)에서 장성 사i메 이르는 4km 구간에서 국 군과 유격대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중대본부가 있는 문장으로 들어오던 병‘력들이 빨치 산의 피습올 받아 크게 당하고 말았지요" 월악리 학살 사건에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정 일웅씨(65)의 중언이다. 정써가 말하는 10월 말이란 정확히 옴력 10월 26일이다. 그날 전투에서 국군은 장성에 주둔하고 있는 8중대의 지왼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생자를 내는 둥 큰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알 려진다. 이날 전투에서 국군이 크게 퇴패 했음은 당 사 군인들이 전우의 즉음올 애드하기 위해 철모에 흰색 띠를 둘렀다는 많은 사람들의 얘 기가 이를 뒷 받칭 해준다. 바로 다옴날인 zl일 국군악대대적인 반격이 시작 된다. 전날의 전투에서. 빨치산으로부터 븐 피해픔 당한 국군은 전투지역 내에 있는 동촌과 장교려(진 다라) 일대 소탕작전에 나서 70여영의 양민윤 사살 하는 만행올 저지른다. 명분이야 빨치산윤 색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화생자틀은 무고한 농민들이 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 죄가 있다연 목숭이 무서워 밤손님에게 먹올 것윤 준 것 뿐. 그러나 이는 밥손님의 요구릅 거절했다가는 복 숨올부지할수 없는상황에서 있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우리 동네에는빨치산틀이 한영토혔혔블뿐아니 라 증대병벽의 국군이 반격해 오는데 빨치산뜰이 .-1 대포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아무선 죄도 없다고 생 각하고 나갔다가 떼죽음을 당했지요" 당시 16세의 소년으파 이달의 현장플똑똑히 지켜 보았나는팍상 일씨(59)의 얘기다. 팍씨논이 이야기펀 꺼내^~1l~4 눈시불블 붉힌다. 동-흔 앞뜯 속칭 부l성써 tl~위에 /1 12 ’ [ A 니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