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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닝-댄밸빼 따-애 걷뼈 i@@ω 파 tN 。(}@파] 아직도맺힌 6'25의 펌, f.x"['H과학살사건 ... …449 고 있는 주민들에게 앞에서 갑자기 기 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 촌。l나 내통 6개 마율과는 달리 모여 얄기도 전에 앞£로 걸어오는 사람을 향해 총을 발사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졌다. 길양 쪽은 질떡질팩한 논바닥. 이 논바닥에 시체들이 쏟아진 것이다. 몸은 온통 피투성이었음은 물론이다. r동네 사람들이 길을 따라 쌍구룡 쪽£로 줄줄이 오는데 갑자기 앞에 서 기관총소리가 났어요. 본능척A 로 모두 엎드렸지만 이미 때가 늦어 대부분-총을 맞았지요. 그중에서 살 아남은 사람은 극히 적었습니다. 우 리 동네에서만 음력 12월4일 날 제 사(제사는 하루전에 지낸다)가 70여명 이 념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나 미혼 남녀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사 ‘망자수에서 빠지게 되고 또 광암리 산내리 대각리 사람들은 우리 동네 가 아니라 알 수 없었으므로 전체 희생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 나 2백30여 명쯤 되 었던 것으로 기 억됩니다』 Y씨 (52)의 말이다. 당시 14세였던 그늠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악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면소재지로 볼 일 이 있어서 나왔다가 화를 연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보니 난려가 나 있더 라』고 덧붙였다. r나는 광암리에 살고 있었는데 모평 ~로 소개했다가 다시 성외로 옮겨 살고 있을 때입니다. 이날 군인들이 총을 ·쏘며 마을을 에워싸더니 붐을 r]~을을- 기 습하게 된다. 1백 70여 , 가구 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파평 윤씨들 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부촌. 그러나 팅·시에는 공비들의 근거지인 불갑산에 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들티 출 몰이 심했던 곳 중의 하나다. ι 이 때문에 국꾼과 경찰은 이 마을에 찌 서 ·불갑산과 가까운 광암리와 산내리 ‘까 대각리 주민들에게 소개하라고 권고했 삼 던 때라 팡암 대각 산내리 주만들이 꽉r 모평 마을어l 많이 와 있었고 엘부는 친 성외와 나산면 이푼리쪽으로 꾀난해 휩 가기도 했섰다. 이 마을 주민중 :우익 펀 적 성향이 뚜렷했거나 살림이 넉펙해 댄「밤손님」들의 표적이 될만한 사람들은 덴이미 광주나 함펑£로 떠냐가버려 대 꽉 부분 노인이나 아녀자들만 남아있었 t 다. 군인들운 마을을 덮치자마자 예외없 이 집집마다 불을 놓았고 주민들에게 ; 는 마을앞으-로 모이라고 소리쳤다" 어느 아녁네는 이불과 쌀을 머리에 i 、 이거나 등에 지고 나오71도 했었디 젠 주민들은 훨훨 타오르는 자신들의 집 5‘ 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군인들의 꽉 성화는 장시도 멈춰 있게 하지 않았 -다.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앞에서 해보와 나산 간의 도로에 있는 쌍구룡 마을쪽오로 ?l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혹은 길 위쪽 산기숨 길을 걷기도 했었다. 이 산7、숨 길은 지끔은 장성댐 수로 } 생긴 후 농업용수가 많아지자 논으 변해벼린 곳이다. 공포와 불안의 을 지우며 무심히 앞으로 걸어가 을 알고 있는 데다 이틀전 지서가 습 격당했던 것£로 보아 지서가 들어온 것윤 12월5일 이전이었음이 분명하고 5중대는 그로부터 l주일 이전쯤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L씨는 나산, 해보, 월야지 서중 월야가 제일 나중에 들어 왔다고 밀해 해보지서가 월야지서보다 먼저 수복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이곳 은 공비들의 말호가 심했던 지역이어 서 먼저 국군이 진주해 어느 정도 치 안이 확보된 후에 경찰이 들어왔었다. 특히 당시 군인들이 들어와 부녀자 를 농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초토 화작전 때 처녀들이 유부녀로 가장하 기 위해 머리를 올리고 아기를 엽고 나왔던 점으로 보아 진주시기는 상당 히 /앞섰던 것 같다. 주민들은 대체적 £로 5중대의 진준시기를 11월 하순으 로 보고 있다: ’. 한날 제사 70여염 5중대는 해보연 금덕리 속갱 푼장장 터에 진을 쳤다. 지금은 현대u1용실인 2층콘크리트 건물자리에 있었던 초라 한 초가꺼붕의 건물이 중대 본부였고 그 뒤쪽 장터바닥에 지하참호를 파놓 고 기거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약 l km 쯤 떨어진 유정자라는 마을과 고 두마을에 각각 진지를 설치하는 한편 곳곳에 초소를- 설치해 공비들의 기습 에 대비했었다. 제5중대는 다음해인 51년 1월12일 음력 12월5일에 해보면 상곡리 모평 모평마을, ·백성들에 대해 간이재판이나 간단한 심사절차라도 거친 후 어떤 조치릎 내 렸어야 하는데 무작정 M1 소총을 난 사해 버렸으니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느 냐는 것이다 . • 제5중대는 그뒤에 불갑산 작전에 투 입되기도 하지만 그 전에 또다시 한마 을 주민을 대량사살하는 작션을 벌이 게 된다. 그러면 5중대가 이곳에 주둔하기 시 것은 언제인가?、 이에 대해 정확 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알만한 사람을 민·나지 못했다는 표현 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육군본부가 발행한 「공비토벨사」나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말행 한 「공미 연혁」은 Ü"2월18일 함평군 해보면 1t,‘찢 里에 속출하여 부근에 준동중인 공비 들에게 공격을 가하여 성멸하고 부큰 알대블 확보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날짜는 전혀 맞지 않는 다. 이미 12월5일과 7일 두차례에 걸 쳐 동촌과 월악산 주변 6개 마을을 초 .F' 간시킨 부대는 5중대가 분명 하다는 h l i을 주민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민들은 38년 전의 악옹이 되 살아 난 듯 그 중대장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며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월야지서장으로 부임했 던 L씨 (64)는 『국꾼이 우피(경칠)보다 앞서 들어왔었다. 우리가 월야에 들어 간 것은 12월 초로 기억된다』고 말하 고 있다. L씨가 6개 마을 초토화작전 448." .. , ~Ji~;~’1989-6 ιJ μ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