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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맺힌 6'25의 빠, 따까2.Ql(학양사건 ·‘ .... ~tj3 었다』고 말했다. 그는 r이 곳에서 5 km 쯤 떨어진 계럼리 시목마을 사람 으로 칩에 있S연 공비들에게 신분이 탄로날까봐 이 마을에 와 숨어 있다」 고 덧붙여 말했다. 【써싸 M- 댄않빼 따m 걷빼 i @@ω파 tN 。(}@파] 「엎드려/ .n 구렁에 일제사격 그러자 중대장 K대위는 권총을 빼 들고 그 자리에서 그 젊은이 머리를 향해 한발의 총알을 쓴 다음 연거푸 두 발을 다시 쏘았다. 젊은이는 피를 뿜으며 쓰러지면서도 「대한민국만세」 를 외치며 숨져갔다. 순식간이었다. K대위는 r이 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진짜 방위군 소위라고 한다면 우리가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됐는데 여태까지 나오지 않다가 이제야 나온 것은 더욱 패썽하고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중대장은 17세 이하와 45세 이상을 별도로 분리했다. 15세 이하 또는 60 세 이상이라고 중언한 목격자도 있지 만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면 17 세 이하와 45세 이상이 맞는 것 같다. 17세가 안 되었지만 키가 커서 인정되 지 않는 소년도 있었고 45세 이상이지 만 얼굴이 곱거나 옷을 말끔히 입어 젊은이 무리에 끼게 된 사람도 있었 다. 군인들은 17세 이하와 45세 이상은 별도로 조를 환 뒤 r마을로- 내려가 미 처 타지 못한 집에 불을 지르라』고 내 려 보냈다. 이제 남산되에는 17세 이상 45세 이 하의 젊은이들만 남아 있었다. 이 가 말각되면 총살하겠다』고 뛰협했다. 주 민들이 상이나 팽이를 찾무며 허풍대 자 괜찮다며 그냥 모이라끄 하는 것이 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마을 앞 남산외 강 인슛해 갔다. 순촌, 못갓, 내동, 옹산, 송계괴정 마을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채 남산외로 올라 가고 있었다. 젊은 여자냐 처녀들을 보면 군인들이 욕을 보인다는 이야기 예문에 띤부 처녀들은 급히 머리를 올 리고 이웃집 아기를 둘러엽고 나가는 ‘ 사람도 있었다. 송계마을 바로 뒷동산 이기도 한 남산외는 6개 마을 가운데 에 있는 주그만한 동산이다. 이 동산 에는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지금은 이 곳에 대규모의 양계장이 들어서 있지 만 그때는 어린이들이 모여 뛰어 놀기 좋은 장소였다. - 답산외에서 내려다 보이는 2백여 가 구가 살고 있는 6개 마을에서는 불길 이 활활 타오르면서 하늘을 덮어버릴 듯한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l천영 안팎의 사람들이 모 - 여서 웅성이고·있었다. 요전 10시폼이 었다. 중대장 K대위가 주민들 앞에 나섰 섣 다. 그는 r명당자리를 잡아야겠다」며 첼 군인과 경찰가족 또는 유가측은 앞으 ι 로 나오라고 말했다. 또 군인에게서 온 펀지룹 갖고 있는 사람도 나오라고 했다. 이 때 어느 젊은이가 앞£로 나왔 다「 그는 종명을 내보이며 자기는 『방 위군 소위인데 후퇴뜰 못하고 숨어 있 국군의 보복이 번갚아 가며 가해진 것 이다. 『명당자리를 잡아주겠다』 동촌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이흘 뒤 인 ]2월7일 (음력무코는 10월28일) 이 침 8시쯤 제5중대 병 력은 월야변 월익 리 내동, .. 못갓, 순촌, 송계, 동산, 괴정 등 6개 마을을 기습했다. 이 마을들은 동북쪽에 있는 해빌 1 백64m의 월악산 자락에 옹기종기 자 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총마을로서 특히 東葉 鄭씨와 팝州 횟ß씨가 집단으 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기도 하다. 군인들은 마울로 들어서자마자 총;을 쏘아대면서 동네를 포위하고 불을 질 렀다. 군인들과 이 장은 『도로복구공사 하러 가니까 냐아에 관계없이 모두 나 오라』고 외쳐댔다.- 이들 마을에서 가까운 도로는 광주 -영광간 국도. 밤이띤 공비플이 민간 인을 동원해서 도로를 파헤쳐 치단시 키고 낮에는 경찰쪽에서 동원해 꽉구­ 공사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던 매였 다, 군인들은 r만약 집 에 남아 있다가 했다. 월야지서의 경우 한때 낮에만 근무하고 밤에는 아예 5중대가 주둔하 고 있는 해보지서로 피신하기도 했었 다는것. 특히 월야띤 예덕리 예동마을 주민 들은 지주들이 많아 우익적 성향이 있 었는데, 공비들에 의해 학살당하논 사 람이 생기자 얼마후 이의 보복으로 공 비와 내통한다는 오해를 받은 사람이 보복당했다. 이렇게 해서 보복과 재보 되풀이되는 바람에 이 동네에서 만 무려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이 때문에 좌익이냐 화익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불갑산이나 태청산으로 피신해 버렸고 우익이나 우익적 성향 이 조끔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광주 나 함평 또는 면소재지로 피신해 나가 버렸다. 그래서 마을에 남아 있는 사 람들은 아무런 사상이냐 성향이 없는 순수 양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이 지역은 밤에는 좌익, 낮에는 우익 세상이 되었다. 주민들은 밤에 오는 공비들을 「밤손념」이라고 선‘꾀며 무서워한 나머지, 그들의 요구 돼노 무조건 모든 것을 옹해줘야 했었 다. 이같은 상황에서 공비들의 기습과 4-r:: ..... ~Ji*뽀'1989-6 Cλ3 ζ10 •-' \總천}시고 \機간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