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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 _ --•-- ----------------- - ----------------- _j S:SA JCU닥NAL 1998.0 G 43 버l 일에 7벼 있던 햄 양민 랩λ댄의 l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사람은함평군청 정근욱 위민실장(49)이다. 정실징베 이 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때는 민선 단체장시대가열 린 96년이었다.50년 12월5일 함평군 월야면 남살와 학살 사건에서 큰형을 잃은 정실장은, 96년 군청으로부터 양민 학살 진상 조사 업무 를부여받고전국각지를누댔다 정씨는 약 2년간 조사해 양민 학살을‘저지 른 부대원들과 사건을 목격한 경찰 간부 등을 만나 쟁생하게 증언을 채록했다 아울러 군부 대 기록을 뒤져 사건 당시 가해 부대원들과 책 고학살사건의배경등증거자료도 “결쩡쩍 증겨 확보했다” 암평군정 정근욱 위민실장 -4ag --;i <-< 정근욱실장;"7f해자 처벌 원치 않는다” 확보했다 군대펴 학살 행위를 조사하는 둔제였기 때 댐공무원으로서 어려운점이 한두찌가 아니었다고 고충을 토로한 정씨는, 함평군청 익 조사로 진상이 낱낱이 드러난 만큼 이제 남 은것은명예회복조처뿐이라고말한다 “쁨들은 보상도, 가해자 처별도 원치 않 는다.정부가위령탑을건립해 억울한희생자 들의 원혼을달래고, 유족들이 화합의 장에 나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정씨는 요란하게 득별법을 제정할 필요도 없이 거창사건등에관한특별법’을일부손 질해, 현재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되어 있는 거창사건 지원단으로 하여금 함평 사건까지 처리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요즘 도 유족들과 대책을 숙의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다 •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양민 학살에 대한 ‘양심 선언’ 을 받아냈다. 이들 은 모두 당시 상부 명령의 잔혹성을 거론하며 정 부가 진상 조사를 할 경우 기꺼이 증인으로 출석 하겠다고했다. 또 함평군측은 사건 당시의 5중대 행적을 기록 한 전투상보를 입수함으로써 사건 배경과 피해 규 모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갑산 공바 토별 작전을 기록한 이른바 ‘대보름작전 에 관한 전투상보에 는 2개월간 벌어진 이 지역 작전에서 국군은 적 1천5명올 사살했고, 아군 피해는 2명이라고 적혀 있다. 함평 사건 유족과 군청측은 이 내용자체가 정상적인 적과의 상호 교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양민을학살한과정을담아놓은것이나다름없다 고주장한다 현재 유족들과 함평군청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 도, 이처럼 확보된 명백한 증거를 정부가 확인하 고 거창 사건에 걸맞는 명예 회복 조처를 취하라 는것이다 이 지역 국회의원인 김인곤의원은집권당차원 에서 함평사건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고, 이것이 뻗}들여져 지난 6월29~30일 국민회의 진상조사단이 현장을조사했다 새로 취임한 이석 형 함평군수도 7월 말우선 군청 차원에서 위령탑 건립 부지 3천평을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건립비 10억원을 모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유족들이 정작바라는것은정부가공식 적으로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항변은지난48년간유족이 겪은수난과풀이익에 서기인한다 희생자후손들이공직에라도진출할 라치면 어김없이 .선원 특이자 라는 딱지가 따라 붙어 불이익을 받아왔다 환갑 넘어 학살된 할머 니에게좌 ‘여자 빨치산’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어 있고, 가옥을 불태운 뒤 집에서 수거해 간 호 미와삽이 ’노획 무기’로묘사되어 있다 5중대장 권준옥씨는 70년에 중령으로 예편한 뒤 낚시 가지l룹 운영하다 91년 62세 나이로 사망 한것으로확인되었다 특이한사실은예편후그 가이름을 권영구’로바꾸고살았다는점이다 거 창사건과함평 사건의 공동 책임선이라 할수 있 는사건 당시 11사단장 최덕신은 아이러니하게도 64년 북힌으르 망명했디 그후 줄곡 북에서 대낚 선전의 이용 도구가 되었던 최덕신은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 丁喜相기자 - 318 총을 설치하고 50여 명을 사살했다. 5중대와 8중 대의 핑풍 게임식 명령에 우왕좌왕하다 억울하 게학살된것이다 이처럼 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월야 해보 · 밖i 변에서 집 단 학살된 주민은 5백24명, 가옥 소설은 1천4백54호에 이르렀다. 이는 60년 국회 양민학살특별조사위원회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이다. 당시 국회는 끔찍한 양민 학살 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후속 조처를 행정부에 이관 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 -16과 계속된 군사 정권에서 이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민회의 진상조사위 구성… 현장조사 오랜 침묵의 세월을 딛고 유족들이 뭉친 때는 91년 이들은 국회에 청원서를 내는가 하면 전남 도청에 유족회 (회장 정진재)를 등록하고 진상 규 명과 명예 회복을 호소했다. 함평군청이 직접 진 상 조사 적볍에 나선 것도 이 무립이었다(오른쪽 상자기사참조) 함평군정측은 지 난 2년여 조사를 통해 생존한 5중대 부대원들의 소재를 파익 했고, 그들로부터 3이었던 김일호씨. 그는학살 진상에 대해 ‘양심 선언’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