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page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l-_.~.터 뜯를펴l 폰l g훌뾰! 학잘 류족‘호곡’ 4a년 6.25 때 군 · 경 앞장, ‘보련사건’선 30만 몰살 K시사저널% 기록·증언 보강, 상황 재구성 ~I 국전쟁의 포생이 -맞은 지 40년이 j 여기에서 소개하는 양민 사 。 ... 흘렸다. 반째기까 다 되어 가도록 1 학살 사례들은 1:l}.록 그런 ‘: ' .. 'L.! 동족상창의 쓰라련장처는 아직도 | ‘억울한 ,죽음’에 대한 기록 끼 긴 파장으로 민족 구생원틀의 가솜에 남아 | 에 근거한다. 이 기록은 김 .-;웠뎌.,-그 버글을 ‘있체.'.환 분단 역시 여전회 ! 영상 돼통령.9_~말주닿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으로 활동하던 채4대 국회 ‘다행히 지난 몇년 동안 남북한 당국은 분 I (60년 4 -.19 직후) 에서 유 단올 극복하기 위해 전향적인 노력을 보여왔 ! 족의 진정을 토대로 하여 고,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의 화해와 | 현장올 답사환 보고서이다 τ 통일노력은 한충 진전될-기미를 보이고 있다. I 당시 국회는 자유 • 민주 • 휴전후 40여년 동안 남북한 사회를 획일적으 |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한 진 로꺼배해 오던 서로의증오심은 차츰 동포 ! 상조사반을각지의 사건;현 〕의식/고취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정부는 | 장에 따견해 조사를 벌인 / '-~6상잃 전챙도 책엄 논챙보다는 상처를 아물 | 후 “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 게 하는 방향으로 논의의 물꼬를 터나가겠다 「 자”처발 피해 보상요구에 ~ ~ .. - 는입장을 보인다 " I 대해 새로 들어설 민주당 ι‘ 그런넨 북쪽과 더불어 흉포얘에 일각해 상 ! 정부가 군 • 경 • 검 합동수 、ε , 처를l 치유하고자 노력하기에 앞서 우리는 정 | 사본부를 셜치해 해결하도록 한다?는 - 착、한국사회 내부의 굶은 상처를 외면하고 | 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이듬해 발생 있는‘ 것은 아닌지되돌아볼때가되었다. 그 | 한 5. '16쿠데타로 이: 결의는 물거품이 흰 상처는 지난 40여년 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 채 오늘에 이르렀다. 온; 6 -.. 25를 전후로 한 시기에 발생한 민족 , (시사저빙은 당시의 국회 기록을 토대로 사 비극의 한자람이다, 하여 생폰 유족과 목격자, 사건 관련자들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6.25 무렵의 학 | 증언을 보강해 은폐된 양민학살 사건들을 재 살· 납치 · 범죄 들을 모조리 북쪽 책임, 인 l 구성했다. 민군과 그 사주를 받은 꽉익의 소행으로 돌 ’ 립으로써 자신의 결백올 강조혜온 것이 사-설 이다. 그러냐 불행하게도 전7명의 소용돌이 속 에서 ‘일부 국군 • 경찰 · 우익’이 비무장 민 간인올 무차별 학살한 것이 사질이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시대 정신’이 봐다시피 해온 반 공의식과 대북 적개심을 고취하는 데 전혀 ........ I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논의가 철저히 금기 시돼왔다. 이제 억울하게 쓰러져간 항혼들을 진혼해 야 하고, 그 유족들 가슴에 맺현 말 못할상 처도 치료해 주어야 할 때가온것 같다 42 l 훨불뿔표훌훌 ;산z)숨에서 각각 함살했다. 학살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군 정보계통을 통해 정부에 전달됐음이 확인된다. 사건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현지에 내려와 유족틀을 위로한 것이 다.‘ 50년 1월8일 신성모 장관은 금룡국민학 교로 유족들올 불러모았다. 당시 국민학생으 로서 일가족 5명을 잃고 산기숨 학살 현장에 서 기적처럼 살아난 채의진씨 (57 . 현재 서 울 쌍문동 거주) 는 신성모 장관의 방문 당시 를이렇게 설명한다. “50년 1월8일 경찰이 생폰자들을 찾아서 금룡국민학교로 모이라 했다. 연단에 올라선 신장관은 자기가 3개월 전 여순반란 사건 현 장에 다녀왔다는 얘기며, 해방후 우리나라에 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 슬프다는 퉁 한참 연설을 하다 직접 눈물을 닦으면서 우는 시 늄까지 했다 신장관은 연설후 즉석에서 이정 희 문경 군수에게 1백만원을 건네주며 우선 유족들 집이나 짓고 살게 하라고 했다. 그는 tJ; 49년 12월24일 ‘중무장한 국군 병력 60여 명에 의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주민 86명이 학살당했다. 피학살자 86명 중 여자는 41명, 15세 미만 어린이는 22명 (국민학생 10명, 한살짜리 갓난애 5명 포함) 이었다. 당시 학살 부대는 두곳에서 학 살을 자행했는데 부녀자 · 어린애들은 마을 앞 논두렁에서, 하교하던 국민학생과 문경중 학교 건립을 위해 벼 한말씩을 원동부락 동 회에 공출하고 톨아오던 장정들은 마을 통떤 시사저널 1993.7.8 n / ] 1 l 4 ?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