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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보도자료 1949년 -2010년] 나는 屬體 더 미 서 살아 나왔다 - 威平렬殺事件 生存者의 말 機關鉉으로 마구.. . 뼈에 사무친 『第五中餘』 의 蠻行 갓난애는 밟아 죽이고 나는 死體 더미셔 살아 나왔다 - 서기 1960년 5월 21일(토요일).한국일보 7단 기획기사 - 속보: 1천여 명의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는 전남 함평(J或.2_I_~)군 하-월야면(月也-때)과 해보면(海保面)에서의 만행진상이 현지를 찾은 기자들에 의해 상세히 드러났다. 이 고장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당시의 r저115중대』 란 말만 들어도 폼서 리를 치면서 10년 전의 i순픈 사실/을 다음과 갇이 알려주었다. 윌 야 면 11대한민국 만세” 중에 맞아 쓰러지는 전직 호국군얀 정(鄭)씨의 필사적인 힘의 외침 이었으나 “이놈의 자식”이라는 욕설과 함께 또다시 퍼부은 총탄에 l정씨의 맥박을 잃 게 했다는 이야기는 83년 음력 10월 29일 함평군 내에서 제일 먼저인 월야면(月也베) 325명 칩단학살사건의 무자비한 주둔 꾼인들의 만행을 대변하는 것 같다. /정/씨는 /1살려면 집에서 나와 뒷산에 모이라ι하는 제5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장 권 (權俊玉)대위의 추상같은 호령에 죄 없는 우리 들은 설마하고 따라 나선 500부락민들 속 의 한사람으로 부락에서 200미터 지점인 뒷산 형장에서 모든 증명을 제시하며 호국 군 인이었음을 주장했으나 군인들은 이를 본체만체 방이-쇠를 잡아당겨 쓰러뜨리고 대한민 국 만세를 외치는 /정 y씨에게 또다시 총탄세례를 퍼부어 죽였을 뿐더러 6 .25때 후퇴하 여 집에 없는 남편이 동 부락에서 3킬로미터 지점인 불갑산(佛甲 111 )에 입산했다고 경 찰이었던 노(뿔、興用) 씨의 부언을 총살했다는 것이다. 부락민들은 이 학살에 앞서 동월 28일 밤 동변에서 공비와 교전중인 2명의 군인이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알고 있으나/ 학살 당시 부역자와 공비는 이미 불갑산 속으토 자취를 감추어 버려 참변을 당한자 중에는 부역자가 한사람도 없었고 죄가 없 기 때문에 남아있었던 양민들이었다는 것이다. 5중대 사병 한사람과 친해졌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월야리(죄也 뽀_)의 김(金容평=45)씨의 말에 의하면 5중대는 하루에 공비 300명과 건물 50동을 사살 또는 소각시키는 전과를 올라라고 상부에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락민을 학살하고 집을 불살라 이를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고 밭에서 일하다 끌려왔던 농민들을 죽이고 그 손에 쥐어진 농구(뿔具)들을 사살한 공비에게 얻은 노획물로 압수해갔다는 것이다.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