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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11 군유산작전 뒤인 1951년 2월 25일(음력 1월 20일) 조길춘이 경찰에 연행되어 학교면 얼 음재에서 시신을 수습하여온 사건에 대하여 같은 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김경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조용순은 저보다 10여 년 이상 나이가 많았고, 김병술은 1, 2살 더 많았는데 관동에 살 았습니다. 조용순을 동네에서는 조화실이라고 불렀는데 그 분은 불갑산 대보름 작전 뒤 경 찰이 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용술은 연행될 만한 일도 없이 애매하게 돌아가셨습니 다. 조용술의 시신은 학교면 얼음재에서 수습하였습니다.” 231) 나) 월야면 232) 외치리 백야마을 정태진(다-5607)의 아버지 정재두, 장철금(다-5608)의 아버지 장동섭, 정광섭(다-6335)의 아버지 정판근 등은 1951년 3월 20일(음력 2월 13일) 월야지서 경찰 ○○○에게 월야지서로 연행도중 백야마을 모퉁이에서 살해되었다. 다음은 신청인 정태 진, 장철금, 정광섭의 진술이다. “아버지는 1951년 3월 20일(음력 2월 13일) 외치리 백야에서 장동섭, 김남수, 233) 그리고 월악리 정판근과 같이 월야지서 ○○○ 순경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광주에서 비누 공장을 하면서 월야면 대한청년단장을 하였고 김남수, 정판근도 대한청년단원이었습니다. 또 장동섭은 전쟁 전 나산면장과 월야면장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재산과 학식이 많아서 인지 수복 후까지도 좌우 양쪽에서 피해를 보자 불갑산으로 가셨습니다. 경찰 ○○○이 나 중에 ‘인공 때 좌익이 부인을 경찰가족이라고 죽였다. 수복 후 월야지서에 와 이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였습니다.” 234) “아버지는 해방 후 월야면장을 하셨는데 피난을 가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회에 서 일하였습니다. 수복 후 아버지는 자수하려고 월야리 백야마을에 숨어 계셨습니다. ○○ ○의 처가 쪽이 인민군 점령기에 경찰가족이라 죽었는데 막아주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죽였 230) 신청인 조길춘 진술조서(2008.6.12.) 231) 참고인 김경수 진술조서(2009.6.15.) 232) 월야면은 함평군의 동쪽에 위치하여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해보면, 북쪽으로 장 성군 삼서면과 접하고 있다. 월야면은 군인들의 작전 지역이어서 경찰에 의한 사건은 다른 면에 비하여 많지 않았다. 233) 김남수는 월야면 월계리 391번지에서 1922.8.26. 출생사실은 확인되나 사망신고는 미처리되어 있었다. 월 야면-10618 234) 신청인 정태진 진술조서(2008.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