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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10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송인방은 집안 아저씨뻘인데 나산 지서에서 불러 나갔다가 경찰에게 구타당하여 죽었 다는 이야기를 송종원으로부터 들었었습니다. 송인방은 전쟁 전에 정식 경찰은 아니고, 자 위대 같은 것으로 밤이면 작업복을 입고 지서에 보초근무를 나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송종원은 인공 때 무슨 위원장을 하였는데 주변에 피해를 준 것은 없습니다.” 225) 나산면 용두리 오옥순(다-5606)의 시동생 정제봉226)은 좌익 활동을 하는 형 정제룡227) 의 심부름을 해준 뒤 집에 있었는데 불갑산작전이 끝난 뒤 경찰에 연행되어 나산면 우치 리 ‘깡치굴’에서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다음은 오옥순의 진술이다. “입산 시점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남편이 좌익 활동을 할 때 시동생이 몇 번 도왔 다는 것 때문에 불갑산에 끌려가다시피 입산을 하였습니다. 입산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좌익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불갑산 작전이 벌어지자 몰래 산에서 내려와 집에 숨어 지내 다가 경찰이 산을 돌면서 수색하자, 마을 어귀로 뛰어나가다가 경찰이 쏜 총에 무릎을 맞아 결국 잡혀 죽었습니다.” 228) 정제봉의 좌익 활동과 관련하여 사촌동생 정제섭은 “정제봉이 사망한 것은 처음에는 형님 정제룡을 따라다녔는데 나중에는 정제룡과 함께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죽 었다. 정제봉은 1951년 정월 대보름 작전 후 나산 ‘깡치굴’에서 경찰이 총살한 것으로 알 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229) 나산면 월봉리 관동마을 조용순은 시장에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1951 년 2월 불갑산작전이 끝난 다음 마을에 들어온 경찰에 연행되었다. 아버지 조용순이 경찰 에 연행되어 사망한 사건에 대하여 신청인 조길춘(다-4432)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아버지는 관동마을에서 돗자리를 짜 팔아 생활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돗자리 장사를 하는 것을 알아서인지 경찰이 아버지께 돈을 요구하였는데, 아버지가 응하지 않자 다음날 경찰이 마을에 와 사랑방에서 아버지만 연행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 시신은 학교면 죽정리 얼 음재에서 수습하였습니다. 사건이 났을 때가 8살이었는데 학교 가기 전이었습니다.” 230) 225) 참고인 송종화 진술조서(2008.6.25.) 226) 정재(제)봉은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 제2호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í��서 기1947년 刑公第245號��, 1947.9.6, 광주지방법원목포지원. 227) 정제룡은 해방 후 남로당 함평군 나산면당위원장으로서 1946.11.1.함평경찰서 기습시위 등을 주도하여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령 제2호, 형법 제55조 등을 위반하여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서기1947년 刑公第383․385․449․367號��, 1947.9.24, 광주지방법원목포지원. 228) 신청인 오옥순 진술조서(2007.9.7.) 229) 참고인 정제섭 진술조서(200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