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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09 자 심안순은 딸 2명을, 전병일은 아들 2명을 데리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전병일은 뒤따라오던 경찰의 총격에 군유산 중턱 바위 밑에서 사망하였고 아들 태용(당시 5세)은 피난민을 따라 정상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전병일의 사망소식은 아들이 주민들을 따라 군유산 봉우리까지 갔다가 내려와 경찰에게 총을 맞았다는 말을 해주어 알게 되었다. 221) 시신은 사건 발생 2, 3일 후 군유산 바위틈에서 찾아 수습하였는데 바위틈에 있어서인지 불에 타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시신은 현장에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선산에 이장하였다. 전병일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처남 심기용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전병일은 제 매형인데 손불면 월천리 어전마을에 살았습니다. 매형이 군유산에 피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매형과 같이 피난을 갔던 생질 태용과 내려온 주민들이 매형의 사망 장소를 이야기해주어 북성리 사기마을 뒷산 바위틈에서 돌아가신 매형의 시신을 찾아왔습니다. 시신수습은 매형 형제와 누나가 하여 마을 앞 선산에 매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22) 3) 나산․월야․해보면 가) 나산면 223) 나산면 삼축리 동축마을 송종득(다-421)의 아버지 송인방은 1951년 3월 10일(음력 2월 3일) 나산지서로 연행되었는데 경찰의 구타로 사망하였다. 송인방의 사망사실에 대한 송 종득의 진술이다. “아버지가 전쟁 전 나산지서에서 일을 하여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우리를 경찰 편이라 고 몰살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 어른인 송종원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외가로 피신하였고, 송종원은 인공 때 무슨 위원장을 하였습니다. 수복 뒤 나병호 나산지서장이 아 버지와 송종원을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지서에서 고문과 구타로 돌아가셨는데, 사망사실은 송종원이 알려 주었습니다. 지서에 가기가 무서워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습니다.” 224) 송종득의 아버지 송인방과 같은 마을에 살았고 송종원으로부터 송인방의 사망사실을 들었던 주민 송종화는 송인방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221) 신청인 심안순 진술조서(2008.8.19.) 222) 참고인 심기용 진술조서(2009.3.5.) 223) 나산면은 함평군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에 월야면, 서쪽에 대동면, 남쪽에는 나주시 문평면, 북쪽에 해보면과 접하고 있다. 나산면은 불갑산과 서나주의 연결통로이다 보니 전쟁이전부터 좌익의 활동이 활 발하였던 지역이다. 224) 신청인 송종득 진술조서(2008.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