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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08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년 12월 12일 경찰의 소개명령에 피난을 갔다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는 말을 시어 머니로부터 들었다. 다음은 곽일례의 진술이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경찰이 소개시킬 때 계천리 사천마을에 피난을 나갔지만 시숙 모님은 소개명령이 내려졌을 때도 시동생 둘을 데리고 마을에 계셨는데 음력 1월 14일 군 유산작전 때는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고 합니다. 작전이 끝난 뒤 주민들이 군유산으로 시 신을 찾으러 가서 시숙모와 시동생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였다고 합니다.” 215) 주단임과 박균신 형제의 사망에 대하여 참고인 채희원은 “박용봉의 부인 택호가 송임 댁인데 그 분은 군유산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216) 또 박용 화의 친척으로 송사리 사간동에 살았던 정내숙은 “송임댁과 박균신 형제는 군유산작전 때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는데 시신은 곽일례의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수습하였다”고 진술하였다. 217) 신청인 김이순(다-3649)의 아버지 김희권도 함정리 청계에 살았지만 손불면 북성리 사 기마을 뒤에서 경찰에 살해되었다. 218) 다음은 김이순의 진술이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경찰기동대가 군유산 중턱까지는 올라왔는데 더 이 상은 올라오지 못하고 총만 쏘았습니다. 그러다 반란군이 어디론가 빠졌다는 얘기가 돌고 난 뒤에야 경찰기동대가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경찰은 군유산에서 피난민을 집결시키고 행 색이 이상한 사람은 골라내어 일렬로 세우고 총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머리카락이 길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게 총살당하셨습니다.” 219) 사건 무렵 함정리 청계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김점례는 “김이순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리저리 다녔는데 사건 무렵에는 청계마을에 살았다. 군유산작전이 있던 날 총소리가 들려 아침 일찍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 왔는데 며칠 뒤 김이순의 아버지가 군유산에서 돌 아가셔서 장례를 치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 나이가 19살이었다”고 진술하였다. 220) 또 백운리 백오마을 심안순(다-2614)과 남편 전병일은 1951년 2월 19일 경찰이 진입하 214)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주단임의 이름 외에는 나이 등 기타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 215) 신청인 곽일례 진술조서(2008.5.9.) 216) 참고인 채희원 진술조서(2009.3.4.) 217) 참고인 정내숙 진술조서(2009.3.31.) 218) 신청인 김이순 진술조서(2008.5.8.) 219) 신청인 김이순 진술조서(2008.5.8.) 220) 참고인 김점례 진술조서(2009.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