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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06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기를 가리키며 ‘누가 이 놈 좀 살려주라’고 하셨답니다. 이때만 어머니를 구해드렸다면 살 아났을 것입니다.” 205) 김점순의 어머니 노연순과 동생 김학기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주민 정상일은 다음과 같 이 진술하였다. “김점순의 아버지가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 와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현장을 보았던 사 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시신을 쉽게 찾았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분의 택호가 ‘죽기댁’ 인데, 김점순의 어머니가 어린 애를 보듬고 죽기댁에게 ‘나는 총을 맞아서 죽을 것 같으니 애나 데려가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셨답니다. 그 아이도 어머니와 함께 죽었습니다.” 206) 김점순은 군유산작전 후 할머니와 아버지가 가셔서 시신을 수습하여 동생은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작골에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207) 신여와 수정동 마을은 군유산의 통로이다 보니 작전 이전부터 주민들이 경찰에게 살해 되었다. 신여마을에서는 노장수의 할아버지 노동준이 1951년 2월 3일 경찰에게 살해되었 고, 수정동에서는 노상숙(다-3652)의 형 노광영이 1951년 2월,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노광 영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같은 마을 거주 김용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군유산작전 1주일 전쯤 경찰이 마을 앞에 수정동 주민들을 집결시켰습니다. 노광영이 밤 사람들의 지시로 보초를 섰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게 잡혀왔습니다. 보초를 서던 사람들 은 흰옷에 검은 물들인 옷을 입고 다녔는데 경찰이 검은 옷을 입은 다른 2명과 함께 포박 하지 않고 이송하였는데 중간에 이 사람들이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노광영을 포승 줄로 묶어 계천리 경찰고지로 데려갔습니다.” 208) 부모 두 분이 모두 병중이어서 노광영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다. 209) 같은 마을 이기춘(다-3878)의 아버지 이재용도 이른 아침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자 군 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기춘의 사촌누나 이점례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 술하였다. 205) 신청인 김점순 진술조서(2008.4.9.) 206) 참고인 정상일 진술조서(2009.4.21.) 207) 신청인 김점순 진술조서(2008.4.9.) 208) 참고인 김용문 진술조서(2009.3.5.) 209) 신청인 노상숙 진술조서(2008.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