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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05 “어머니께서 총을 맞을 때 제가 옆에서 보았는데 어머니는 사기마을 뒤 비자나무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광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 채점순이 2살이었는데 어머니는 이 동생을 업었고, 저는 대전에 살고 있는 동생을 업고 돌무덤 뒤에 숨어 있었는데 경찰의 총을 맞았 습니다. 나중에 어머니 시신을 보니 총알이 배꼽 아래를 뚫고 나왔었습니다. 군유산에서 내 려올 때 경찰이 저희들을 신광지서로 끌고 가려고 총을 쏘며 겁을 주어 ‘왜 죽이려고 하느 냐’고 항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 시신은 제가 가서 찾아 그 자리에 매장하였다가 신여 마을로 이장하였습니다.” 202) 수정동은 신여의 아랫마을로 동정2리에 속한다. 수정동 주민들도 작전 이전 군유산에 있던 빨치산이 마을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통하여 “경찰이 작전을 들어오면 다 죽이니 살 려면 군유산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군유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수정동 노병우(다-2612)의 백부 노상근도 사건이 일어난 1951년 2월 19일 경찰의 군유 산 공격에 부모 형제 등과 같이 군유산으로 갔다. 경찰의 총격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는 데 이때 백부와도 떨어졌다. 노상근의 시신은 2, 3일 뒤 할아버지 노몽길이 군유산에서 찾았지만 바로 수습하지 못하고 며칠 뒤 수습하려고 다시 가보니 시신이 없어져 수습하 지 못하였다. 203) 노상근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참고인 정상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노병우의 백부 노상근은 한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분은 생활이 어려워 남의집살이도 하 였습니다. 노상근이 군유산에서 사망하였다는 것은 나중에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04) 또 수정동 김점순(다-3651)의 어머니 노연순과 동생 김학기 등 가족도 군유산작전 당 일 아침밥을 먹을 무렵 총성을 듣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노연순은 아들 김학기를 업 고 군유산 중턱부근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아들과 함께 사망하였다. 노연순의 사망 정 황에 대한 신청인 김점순의 진술이다. “숙모님이 저를 업고 피난을 가다가 종조부께로 교대하여 업힐 때 총성이 울렸고 그 총 성에 우리 가족은 흩어졌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어른들은 군유산 봉우리로 데리고 올라갔 고, 저도 어른들과 같이 갔다가 어둑어둑할 무렵 내려왔습니다. 동네 언니뻘 되는 분이 할 머니께 어머니를 보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옆구리에 총을 맞은 상태에서 동생 김학 202) 참고인 채순금 통화보고(2009.8.24.) 203) 신청인 노병우 진술조서(2008.4.3.) 204) 참고인 정상일 진술조서(2009.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