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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04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경찰이 날짜를 정하여 허가를 해 주어야만 시신을 찾으러 다닐 수 있었는데 정해준 날 짜가 사건이 나고서 10여 일 지나서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헤어졌던 비자나무골을 중심으 로 시신을 찾았는데 아버지는 목에 총을 맞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군유산 비자나무골 은 워낙 넓은 골짜기이라 다른 시신도 많았는데 채천석의 어머니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사망 당시 신광서국민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196) 한규호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노장섭의 진술이다. “한규호의 아버지 한만수는 군유산 비자나무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은 바로수습하 지 못한 상태에서 부패되었는데 관을 가져가 수습하여 부근에 매장하였습니다. 채천석의 어머니도 비자나무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7) 동정리 신여마을 노장수(다-2296)의 할머니 김은곡 등 가족도 군유산으로 피난을 나갔 다. 198) 사건 무렵 노장수의 가족은 조부모, 부모와 삼촌이었지만 할아버지 노동준은 군유 산작전 16일 전인 1951년 2월 3일(음력 12월 27일) 마을 앞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었 다. 199) 노동준과 김은곡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참고인 한규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제가 노장수 할머니 시신을 본 것은 보름이 지나서였는데 주변 이곳저곳에 시신이 많이 있었습니다. 노장수의 부모가 시신을 수습하여 동정리 신여마을에 모신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그리고 노장수의 할아버지 노동준은 그보다 앞서 1951년 2월 3일(음력 1950년 12월 27일) 집에 들어온 경찰에 의하여 돌아가셨습니다.” 200) 또 같은 마을 채천석(다-2298)의 어머니 이중순 등 가족도 총성을 듣고 군유산으로 피 난하였다. 채천석은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영광 염산면까지 갔으나, 어머니 이중순은 군 유산 비자나무골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는 말을 누나 채순금(당시 17세)에 게 들었다. 201) 다음은 이중순의 희생사실에 대한 채순금의 진술이다. 196) 신청인 한규호 진술조서(2008.4.21.) 197) 참고인 노장섭 진술조서(2009.3.4.) 198) “저는 사건 당시에는 신광면 백운리 숯굴 외가에 있었는데 사건에 대한 내용은 생전에 어머니와 집안형 님께 들었습니다.” 신청인 노장수 진술조서(2008.4.22.) 199) “1950년 음력 11월께 소개시키고 동네에 불을 질러 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할아버지만 마을에 남아 있었 는데 군유산작전을 다니던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서 할아버지를 끌고 가서 동네 앞에서 총살하였다고 집 안 형님들께 들었습니다.” 신청인 노장수 진술조서(2008.4.22.) 200) 참고인 한규호 진술조서(2009.3.4.) 201) 신청인 채천석 진술조서(2009.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