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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88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분주소 대원이었습니다. 김연섭은 군유산작전 뒤 잡혀 15년간 복역하고 나와 살다가 사망 하였습니다. 자신의 형 김연섭이 분주소에서 활동을 하였던 것 때문에 김연옥도 피난을 갔 다가 경찰에게 잡혀 사망하였습니다.” 117) 지호마을 문동주(다-4936)의 아버지 문봉순은 1951년 2월 20일 군유산 작전 직후 손불 면 소재지인 대전리 수문에 나갔다가, 3월 11일(음력 2월 4일) 지호마을로 오던 중 경찰 에 잡혀 마을 앞 저수지에서 사망하였다. 문봉순의 사망사실에 관한 문동주의 진술이다. “아버지는 지호마을 인민위원장이었습니다. 인민위원장을 하게 된 것은 반란군들이 부면 장 가족을 도왔다고 죽이려고 하니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라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라고 하여 하게 된 것입니다. 군유산작전 후 마을에 불을 질러 아버지는 대전리 수문으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아버지 시신은 수습하여 현재는 선산에 모셨습니다.” 118) 사건 당시 지호마을에 거주하였던 참고인 백영해는 군유산작전 직후 지호마을 사정과 문봉순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문동주의 아버지 문봉순은 인민군 점령기에 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는데 이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문봉순이 인민군 점령기에 김사병 가족을 숨겨준 일이 있어서 김사병 과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권유로 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는데 그것 때문에 군유산작 전 후 피신하였습니다. 시신은 지호마을 앞 저수지에서 수습하였습니다.” 119) 같은 마을 백강수(다-10812)는 백부 백판준이 군유산작전 다음날 집에 있었는데 작전 을 나온 경찰이 밥을 해달라고 하자 “마을에 여자가 없어 밥이 늦겠다”고 대답하자 경찰 이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120) 다음은 백판준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사촌동생 백충인의 진술이다. “마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대부분 피난을 갔고 사촌형님과 같이 특별한 이유가 있는 분들만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피난을 가서 나중에 들었는데, 그날 경찰이 마 을에 들어와서 주민들에게 밥을 하라고 하였는데 대부분 피난을 갔고 부녀자들도 없어 밥 이 늦겠다고 대답하자 경찰이 바로 총을 쏘았답니다. 그날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 이 117) 참고인 배정문 진술조서(2009.6.10.) 118) 신청인 문동주 진술조서(2008.6.25.) 119) 참고인 백영해 진술조서(2009.6.9.) 120) “백부는 백모님이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은 데다 몸이 좋지 않은 아들까지 있어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 다.” 신청인 백강수 진술조서(2008.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