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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85 산작전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여동생을 업고 있다가 군유산 8부 능선에서 경찰의 총을 맞았 습니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은 현재 광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 이매례가 말해주었습니다. 어 머니는 경찰이 산당고랑으로 연행하였는데, 연행을 목격한 분들의 도움으로 시신은 산당고 랑에서 김영남의 숙부가 이풍식의 어머니 시신과 함께 수습하였습니다.” 105) 참고인 이육종은 “이귀술의 형 이귀만이 반란군 쪽에서 활동을 하여 그 때문에 이귀술 의 아버지가 군유산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사망하였다. 군유산 8부 능선에서 돌아가신 이 귀술의 아버지 이상용의 시신은 주민들이 가서 수습하여 차경마을에 임시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106) 같은 마을 이풍식(다-5098)의 어머니 신연여, 작은형 이창식, 여동생 이영희도 군유산 에서 경찰과 대한청년단원에게 손불지서로 연행되었다. 어머니와 작은형은 경찰에 살해 되었고, 여동생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풍식의 큰형 이형식도 군유산으로 피난을 나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이풍식의 진술이다. “‘입산을 해야 산다’는 분위기여서 아버지와 큰형은 전날 입산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경찰이 개미떼처럼 몰려오자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어머니, 작은형, 여동생은 군유 산에서 손불지서로 연행되었고 아버지는 자수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작은형은 2월 24일 손 불 한청고지에서 죽었고, 여동생은 집으로 왔습니다. 큰형이 경찰에게 죽었다는 말은 군유 산작전 2, 3개월 뒤 큰형 친구인 송복수와 김영남에게 들었습니다.” 107) 이풍식의 가족 등 주민들이 군유산으로 피난하게 된 이유를 “1950년 12월 12일(음력 11 월 4일) 처음 작전을 들어온 뒤로 경찰이 주민들을 조사한다고 연행하여 불안감을 느꼈 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참고인 이귀술의 진술이다. “음력 11월 4일 뒤로는 신광 경찰고지에서 조사한다고 날마다 불러내니 주민들은 군유산 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피난을 갔습니다. 이풍식의 가족은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한 활동 도 하지 않았지만 신광 경찰고지에서 못살게 하여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풍식의 어머니와 작은형은 군유산에서 연행되어 손불 경찰고지 부근 산당고랑에서 총살되었고, 큰 형은 나중에 사망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108) 105) 신청인 이귀술 진술조서(2008.5.21.) 106) 참고인 이육종 진술조서(2009.3.18.) 107) 신청인 이풍식 진술조서(2008.4.19.) 108) 참고인 이귀술 진술조서(200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