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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78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아버지가 아들은 살려야 된다면서, 남동생만 데리고 군유산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어머 니께 들었는데, 경찰이 산에 불을 지르며 ‘손을 들고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려가자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그대로 있다가 동생을 데리고 집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 버지는 손을 들고 군유산 아래로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당시 경찰은 내려온 사람은 일렬로 세우고 총살하였는데 확인사살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75) 박태종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참고인 김남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였다. “박태종은 군유산작전 때 군유산으로 피난을 나와 승선마을 네거리에서 경찰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셔서 시신은 수습하여 산남리 용흥마을 옆 산에 모셨습니다. 그날 저는 월천리, 북성리 승선을 거쳐 군유산 봉우리까지 올라갔다가 경찰에게 잡혀 승선마을 네거리까지 내 려왔습니다.” 76) 내감마을 이광식(다-4427)의 아버지 이부현은, 경찰이 1951년 2월 19일 경찰이 주포방 향과 신광면 송사2리 삼천동 방향에서 경찰이 작전을 들어오니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77) 다음은 이광식의 진술이다. “경찰이 군유산을 점령한 뒤 점심 무렵에 정상에서 피난 나온 주민을 꿇려 앉히고 경찰 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피난민들을 지목하여 옆에서 총살하였습니다. 그렇게 30, 40명 정도 가 총살되었습니다. 저는 경찰이 시켜 소를 끌고 신광지서까지 갔는데, 그곳에서도 경찰이 피난민을 총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시신은 현장을 목격한 주민 박계순이 말해주 어 군남 방향 굴속에서 수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경찰이 손을 들고 나오라고 하니 굴속에 서 나오다가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78) 신청인 이광식과 같은 마을 거주 참고인 김남수는 이부현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주포 방향에서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자 아침밥을 먹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사기마을 뒤 골짜기에서 이부현이 총살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였다. 79) 군유산으로 피난을 가서 행적은 확인되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북풍 75) 신청인 박선자 진술조서(2008.5.8.) 76) 참고인 김남수 진술조서(2009.6.13.) 77) 신청인 이광식 진술조서(2008.5.19.) 78) 신청인 이광식 진술조서(2008.5.19.) 79) 참고인 김남수 진술조서(2009.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