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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74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여 좌익과 함께 주민들을 연행하러 다녔다. 이 때문에 박종인은 1951년 2월 19일 군유산 작전 때는 피난을 갔다가 내려와 경찰을 피해 다녔다. 3일 후인 2월 22일 박종인은 경찰 에게 잡혀 승선마을 앞에서 총살되었다. 다음은 신청인 박종두의 진술이다. “친형이나 사촌형이 경찰이 진주하기 전 어쩔 수 없이 좌익의 말을 따랐는데 그것이 연 행의 빌미가 된 것 같습니다. 형님은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감시하고자 보초를 서기 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집안에 박석기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형님을 경 찰에 밀고하였던 것 같습니다. 형님의 시신은 저와 부모님이 수습하여 현장에 매장하였습 니다.” 59) 사건 당시 박종인과 한 마을에 살았던 주민 강은화는 “박종인은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 가 내려왔는데 2, 3일 정도 있다가 연행되어 승선마을 앞길에서 경찰에게 죽었다. 정월 14일 반란군들 잡는다고 지서 경찰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작전을 하였는데 경찰이 박종 인을 잡아다가 총으로 쏘아 죽였다. 승선마을 비석 앞에서 박종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 람이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60) 차경마을 박대일(다-10817)의 아버지 박강진은 ‘언제부터, 누가하였는지는 몰라도’ 경 찰이 작전을 들어왔을 때 피난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모두 죽는다고 선전하여 군유 산작전이 시작되자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61)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참고인 박병규는 “군유산에서 연행된 분 중 다른 분들은 돌아왔 으나 박강진은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 반란군들은 감물을 들인 옷을 입고 다녔고, 미숫가루 전대를 메고 다녔는데 박강 진도 감물을 들인 옷에 미숫가루 전대까지 차고 피난을 갔다가 군유산 정상에서 경찰에게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감물을 들인 옷 색깔에 전대를 메고 간 것 때문에 연행된 것으로 보 이며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박강진이 경찰에게 끌려가는 걸 목격한 사람 중 현재 살아있 는 사람은 박남윤인데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62) 나) 월천리 북성리 아래인 월천리 어전마을에 살았던 양칠석, 양삼자(다-4285), 양삼두형제도 군유 59) 신청인 박종두 진술조서(2008.5.22.) 60) 참고인 강은화 진술조서(2009.5.26.) 61) 신청인 박대일 진술조서(2008.5.8.) 62) 참고인 박병규 진술조서(2009.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