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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70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총 3정 등을 획득. ❍ 1951. 2. 11. 08:00 무장 30명을 포함한 적 70명이 나산-함평도로에 출현하자 이에 대응 하여 경찰 출동하여 적 18명 사살, 방위대원 2명 전사, 2명 부상하였으며 농가 3채 소각. 이상에서 보듯 군유산작전 이전 경찰과 빨치산은 몇 차례 교전하였지만 빨치산이 입었 던 손실에 비하면 경찰의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즉 군유산작전 이전에 이미 빨치산은 경찰에게 위협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경찰은 적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였고 현지 사정 에 어두운 경찰국 기동대와 신규병력인 함평경찰서 기동대가 작전을 담당하다 보니 결과 적으로 무리한 작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12월 12일 작전에서는 경상남도경찰국에서 배치 받은 경찰 100여 명이 작전에 참여하였고, 다음해 2월 19일 군유산작전 또한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가 작전을 주도하였 는데 이와 같이 토벌 경찰이 지역사정에 어둡다 보니 피난민들에게 ‘토끼몰이 식’ 작전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용경찰 로 함평경찰서 토벌대원이었던 임봉섭은 군유산작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군유산작전은 경찰국 기동대가 주도하였는데 기동대 1개 대대로 병력 수는 최소 15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본국 기동대는 군유산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습니다. 사건 당일 군유산 골짜기가 피난민들로 꽉 차 있다 보니 경찰은 민간인이고 뭐고 간에 보이는 대로 총을 쏘았고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크게 발생한 것입니다.” 46) 다. 군유산작전 이전 손불, 신광면의 상황 국군이 주둔하면서 주도적으로 수복작전을 폈던 월야․해보․나산면과는 달리 손불과 신광면은, 1951년 2월 19일에야 마을단위 수복이 완료되었다.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1950년 12월 12일 손불면 양재리에서 신광면 함정리에 이르는 군 유산 인근의 미수복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고 이후 군유산작전까지 소규모 병력으로 진주작전을 벌였지만, 마을에 정보가 취약한 경찰은 빨치산의 저항으로 진주하지 못하고 진입과 퇴각을 반복하였다. 47) 다음은 송사2리 삼천동 주민 주육손의 진술이다. “삼천동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지방좌익인 무호대만 있었습니다. 무호대는 생산유격대여서 46) 참고인 임봉섭 진술녹취(2008.9.21.) 47) 이 사건 보고서 <사건 지역도 2 손불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