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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9 한편 함평이 수복된 1950년 10월 22일 이후 인근지역인 해보면 광암리 용천사에는 ‘빨 치산불갑지구사령부’가 있었다.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는 군유산작전 다음날인 2월 20 일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 소탕전’을 벌였다. 군경은 대규모 토벌작전을 위해서 2월 19일 자정부터 신광면을 포함한 불갑산 주변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44) 나. 빨치산 등 좌익세력의 상황 1950년 11월부터 군경 토벌작전의 결과 빨치산과 지방좌익 등 좌익세력은 불갑산, 군 유산 인근으로 집결하여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족들을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지방좌 익은 손불 북성리 차경마을과 신광 송사리 삼천동 등 군유산 인근 마을에서 생활하였는 데 보초를 세워 군경의 토벌작전에 대비하였다. 또 경찰의 토벌작전이 있을 때는 비상연 락망을 가동하여 빨치산불갑지구사령부와 연계하여 경찰에 대응하였다. “차경마을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지방좌익(무호대)이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에게 피난을 가야 한다고 압박하였습니다. 지방좌익들은 차경마을 한 가운데에 5칸 집을 지어놓고 그곳 을 본부로 삼았습니다. 그 자리가 북성리 171번지로 리 인민위원장의 집이었는데 그곳에는 생산유격대 1개 중대 40, 5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경찰이 음력 11월 4일(양력 12월 12일)에 처음 들어왔는데 그날은 반란군에게 쫓겨 마을에 불만 지르고 갔습니다. 이와 같은 생활이 정월 14일(양력 2월 19일)까지 계속되었고 경찰이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들은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45) 군경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빨치산불갑산지구사령부 빨치산도 면사무소와 지서 등을 공격하면서 경찰과 교전하였다. 다음은 í��한국경찰일일보고서Ⅰ��(1951.1.10~4.30.)에 나온 주요 상황이다. ❍ 1951. 1. 13. 10:00 손불면 북성리의 적 병력 130명이 주포지서를 습격하자 주포지서 경 찰이 반격하여 사살 12명, 생포 1명 및 비밀문서 획득. ❍ 1951. 1. 26. 15:00 나산면 구산리에 80명의 적 출현, 경찰 2개 소대가 출동하여 적 7명 생포 및 비밀문서를 획득하였으며 경찰 1명 전사. ❍ 1951. 1. 31. 05:00 99식 소총 등으로 무장한 70명의 적이 해보면 대각리에서 손불면 북 성리에 침투하자 경찰 2개 소대가 출동하여 적 13명을 사살하고 카빈 1정, 러시아제 소 44)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민간인희생사건 진실규명결정(2008.12.23.) 45) 참고인 박병규 진술조서(2009.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