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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7 야․해보․나산면 등 동부 3면을 제외한 함평지역의 치안은 경찰이 전담하였다. 1950년 11월 초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신광면 소재지인 계천리 계월마을31)과 함평읍 석 성리 주포 32)에 진주하여 경찰고지를 설치한 후 인근 손불면과 신광면에 대한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함평경찰은 1950년 12월 1일 경상남도경찰국에서 전입한 600여 명의 경찰 중 100여 명 을 배치 받아33)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여 34) , 12월 12일(음력 11월 4일)에는 손불면 북성리, 신광면 송사리 등 군유산과 인접한 일부를 제외한 전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 이후 경찰은, 수복지역 주민을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 등으로 소개시켰는데 소개민들이 경찰고지에 나와 신고하도록 하여35) 군유산 좌익과의 연계를 차단하면서 주 민을 연행․조사하는 등 통제도 강화하였다. 36) 다음해인 1951년 2월 19일(음력 1월 14일), 함평경찰은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 지원 아 래 영광경찰서와 합동으로 ‘군유산지역 토벌작전’ 37)을 펼쳤다. 이 작전에 대하여 「한국경찰대일일보고서Ⅰ」에는 ‘전라남도경찰국장의 명령으로 경찰 국 기동대와 함평과 영광경찰서 기동대가 함평과 영광의 경계에 있는 군유산에 본부를 두고 출몰하는 적 300여 명(무장 80명) 38)에 공격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또 「한국경찰대일일보고서Ⅰ」의 ‘적 무장 80명’은 경찰 수집 정보로 보이는데 당시 군 31)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32) 참고인 김균배 진술조서(2009.8.6.) 33) 전라남도경찰국, í��1950년 인사사령부��, 1950. 34) “함평 수복 뒤 함평경찰서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어느 날 경상도에서 지원 병력이 와서 그 사람들 주 려고 총을 회수하여 간 뒤 저는 대동지서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참고인 송영문(의용경찰) 진술조서 (2009.8.5.) 35) 신청인 채동만 진술조서(2009.5.9.); 신청인 모동진 진술조서(2009.6.10.) 36) 미수복지역에서 소개 나온 주민들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 자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에 나간 후 살 해된 경우가 있었다. 참고인 김유예 진술조서(2009.4.1.) 37) 240900, …(전략)… on 19 February. 1 platoon from Yonggwang Police Station, 1 platoon from Hampyung Police Station and 1 Mobile Company from Chollanamdo Provincial Police Bureau engaged with approximately 300 reds (80 armed) who had established their CP in Gunyusan on the boundary between Hampyung-Gun and Yonggwang-Gun. Police killed 165 reds, captured 7 Russian Rifles, 175 rounds of ammunition, 6 Grenades, 11 Imitation Rifles and 134 rounds of its Ammunition, and seized 70 bags of Rice, 300 bags of Barley and several cows. 24 policemen wounded in the engagement. 한림 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자료집��3(한국경찰대일일보고서Ⅰ), 1996, 247쪽 38) 한국경찰일일보고서의 ‘무장 80명’은 적정을 정확하게 보고하기 보다는 실제보다 확대하여 보고된 측면이 있다. 이 자료는 군유산작전 이후 경찰토벌대로서 지리산지역 토벌작전에 참전한 참고인의 진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안사람들이 들어와 있다고 하니 경찰이 과대평가하여 수복이 늦게 되었습니다. 결국 군유 산은 ‘경찰이 키워서 잡아먹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제 생각에는 손불면 소재지만 수복하고 군유산은 그대 로 두었어도 무안사람들은 도망갔을 것입니다.“ 참고인 김균배 진술조서(200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