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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 연 번 이름 (당시 나이)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소속 신분 주요 진술 6 - 판교마을에는 반란군이 있어 자주 작전을 나갔는데 의경, 경찰, 한청 등 10명 정도였음. 마을에는 주로 노인들만 있었음. - 강운리 방향으로는 마을을 소개하여 작전을 나가지는 않았음. 영수교 보초는 함평경찰서 관할이었음. 7 정복수 (29) 2009 . 8 . 5 . 참고인 자택 진술 녹취 함평 경찰 - 함평경찰서 경찰이 후퇴할 때는 낙오하여 후퇴하지 못하다 인민 군들에게 잡혀 광주형무소에 수감됨. 이후 인민군들이 물러날 때 파옥하고 나왔음. - 병과가 통신이라서 개별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통신계는 전신주 수리하는 게 주요 임무였음. 8 김균배 (19) 2009 . 8 . 6 . 함평군청 진술 조서 함평 경찰 -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다 후퇴 직전인 1950년 7월 19일 함평에 왔음. 아버지가 구장을 하여 마을에 가지 못하고 고모 댁에 피신하 였음. - 음력 정월 8일 반란군 청년단원 안병문에게 잡혀 불갑산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용천사 앞 운암마을 토굴에 있었음. - 군유산에는 작전 다음날 갔는데 시신만 보았으며, 불갑산 작전 일에는 군유산으로 후퇴를 하였다가 불갑산으로 돌아왔음. 이후 조계산으로 후퇴하였다가 경찰토벌대에게 잡혔음. - 소재지 대행동 고모 댁에 있었을 때 낮에 왕래하면서 보았는데 군유산에서 반란군을 볼 수 없었고 단지 무안 사람들이 경찰에 쫓겨 와서 갈 데가 없이 있었음. - 1950년 12월 12일 작전에는 양재리 장재동 주민이 대행동까지 피난을 나왔는데 그때 경찰이 주민들을 주포까지 데려다 총살하였음. - 1950년 12월 12일 작전은 현지 경찰과 경상도에서 온 기동대였 음. 기동대는 해병대였는데 인정사정없었음. 당시 손불지서 경찰력 은 100 명 정도였으며 지서장은 한길수였음. - 주포사건은 음력 동짓달 초 반란군과 경찰의 전투가 있었는데 반란군의 주포 점령 소식을 듣고 석창리 주민이 밥을 가지고 주포지 서로 가다가 경찰을 반란군으로 착각하여 “동무”라고 하여 발생하 였음. 라. 자료조사 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í��빨치산 자료집��3, 199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빨치산 자료집��3권 문건편(3)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Ⅰ(1951.1.10~4.30.)를 참조하였다.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는 빨치산의 동향, 경찰과 빨치산과의 교전 내용을 한국경찰이 보고하여 이를 미군이 정리한 문서이다. 이 자료집 247쪽에는 1951년 2월 19일 전남남도경찰국 기동대와 함평과 영광경찰서 기 동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