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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6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연 번 이름 (당시 나이)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소속 신분 주요 진술 1 - 군유산은 민간인들로 꽉 찼는데 함평경찰은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전을 하니 민간인을 산 고랑으로 몰아넣은 것 임. 정보만 제대로 있었어도 피해는 줄었을 것임. 2 정금용 (16) 2007 . 12 . 6 . 참고인 자택 진술 녹취 함평 경찰 - 경찰모집이 있었을 때 응모하여 의경이 되었는데 서장이 순경으 로 뽑아서 기동대에서 근무하였음. - 함평 수복 무렵 경찰 70, 80명이 와 일부는 대동면 정창까지 갔는데 다시 퇴각하였다가 3일 후에 들어왔음. 수복당시 기동대는 100여 명이었는데 증원되었음. - 당시 기산봉엔 빨치산인지, 민간인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 싸울 수가 없었음. - 경찰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은 이장이었음. 형사계에서 마 을에 밀대를 두고 정보를 받았는데 잘못 주면 엉뚱한 사람이 다쳤음. 3 오정인 (23) 2008 . 9 . 22 . 참고인 자택 진술 녹취 함평 경찰 - 김○○은 불갑산 대보름 작전 이후에 월야지서 형사로 사복근무 를 하였음. 김○○의 처가가 인민군 점령기에 피해를 보았음. - 김○○이 김일동을 죽였는데 김일동은 인민군 점령기에 많은 피해를 준 사람임. 4 김재수 (20) 2009 . 3 . 17 . 참고인 자택 진술 녹취 손불 한청 대원 - 형님 김재성이 향보단 훈련을 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반란군에 살해되었음. - 큰형 김재봉은 구국연맹 손불면 지부장이었는데 경찰과 함께 토벌작전을 하였음. 둘째형 김재룡은 한청단장이었으며 손불면 호 적주임을 하였던 셋째형님은 징용을 갔다 왔는데 동네에 굴을 파고 숨어있었음. - 손불면이 수복된 것은 정월 보름 무렵이었으며, 동짓달 4일 작전 에도 짐을 지고 경찰을 따라다녔음. - 군유산작전은 합동작전으로 신광, 손불지서 뿐만 아니라 영광 경찰까지 참여하였으며 당시 손불지서장은 한길수였음. - 군유산작전에 한청으로 참여하였지만 무기가 없어 앞장을 서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름. 5 김석주 (20) 2009 . 8 . 4 . 함평군청 진술 조서 대한 청년 단원 - 해보지서 주재형사 유영하가 권유하여 대한청년단원을 하다 의 용경찰로 복무하였음. - 신광지서 대한청년단장은 백인선이고 동생 백윤선은 단원이었음. 신광지서장 나성남도 백인선 형제가 하자고 하면 그대로 따랐음. - 신광지서에서 작전을 나갔던 경찰은 수복 후에는 김재일, 박만원 등이며 지서단위 작전은 지서장은 나가지 않고 차석이 나갔음. - 신광지서에선 수복 후 2년 정도 근무하였음. 6 송영문 (18) 2009 . 8 . 5 . 함평군청 진술 조서 함평 의경 - 함평수복 후 경찰서에서 훈련을 받고 기산봉에 막사를 지어놓고 근무를 하다 대동지서로 발령이 났는데 1950년 말부터는 지서 인 근에서 잠복근무를 하였음. - 당시 대동지서장은 경상도 사람이었음. 불갑산 작전에는 나이가 있고 체구가 큰 사람만 참여하였음. - 대동지서에 있던 1951년 1월 초, 형사 한 명이 입산자 가족을 조사하고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