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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60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연 번 관련 사건 성명 (당시 나이) 진술일 진술장소 진술형태 주요 진술 115 - 1950년 12월 12일 처음 경찰이 마을에 진주하였을 때는 마을에 불만 지르고 갔는데 그 뒤 반란군이 상주하였음. -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기존 이장이나 구장이 물러났는데 우 리 마을에서도 박동규가 그때부터 전면에 나섰음. - 군유산 중턱에서 승선마을까지 끌고 내려온 주민이 100~ 200명이었는데 분류하여 어린 사람은 내려가라고 하고는 나 머지는 총살하였음. - 그곳에서 최○○과 김○○을 보았음. 116 참고인 김채섭 (23) 2008 . 8 . 21 . 참고인 자택 진술조서 - 18살에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인들이 나가자 면에서 똑똑하 다는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업무를 봤는데 당숙도 해 방 전 소방대장이었는데 면사무소에 나갔음. - 전쟁 후 군유산에 빨치산이 나타난 것은 함평수복 이후였으 며, 전쟁 전에는 여순사건 이전부터 불갑산 빨치산이 밤에 마 을에 내려왔는데 대부분 총은 없었음. - 마을에 무장 빨치산이 나타난 것은 1948년 여순사건 다음해 군복을 착용한 완전무장한 빨치산 20명이 손불면 방향에서 불갑산으로 이동하였음. - 여순사건 다음해 8월 초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하 였는데 1949년 음력 7월 경 신광면 소재지에 국군 20연대 8중대가 주둔하였음. - 처음에는 8중대가 왔으나 그 후 5중대와 6중대가 자주 왔음. 6중대는 중대장이 광산김씨로 같은 성씨였음. - 1950년 가을 군경이 함평읍을 수복하였다는 말은 면 소재지 에 있다가 마을에 들어온 주민으로부터 들었으며 며칠 뒤 군인 들은 영광으로 이동하였음. - 이후 목포와 무안에서 올라온 빨치산 잔당 10여명이 있었는 데 군유산에 있다가 날이 새면 불갑산으로 물러가곤 하였음. 1951년 2월 19일까지 이런 상태였음. - 군유산작전일에는 새벽 5시경 함정리 달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이때부터 군유산에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음. 군유산에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면서 주민들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것을 목격하였음. - 군유산 계곡에 숨어 있으면서 주민이 경찰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였음. 117 참고인 이용헌 (18) 2009 . 6 . 12 . 참고인 자택 진술조서 - 목포공업학교 3학년으로 1950년 12월 12일 양재리에 경찰 이 진주하였을 때는 양재리 장재동에 있었음. - 양재리는 함평 손불면과 영광 군남면의 경계인데 1950년 12월 12일 새벽 총소리에 밖에 나가보니 피난민은 함평방향으 로 밀리고, 경찰은 영광방향에서 몰려왔음. - 집에서 나와 논두렁 가시덤불 속에 은신하다가 오후 3, 4시 경찰에게 발각되어 상막재로 끌려갔음. - 상막재에 주민 남자 50, 60명과 여자 30여 명이 집결되어 있었는데 그때 경찰유가족이 주민들을 선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