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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57 문(傳聞) 진술을 하였다.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모아놓고 추궁하자 숙부는 빈틈을 타 도망하였습니 다. 군인들이 숙부를 쫓으려 하자 그 순간 할머니가 군인의 발목을 잡고 ‘내 아들을 살려 달 라.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현장에서 대검으로 할머 니를 난자하여 즉사하였습니다. 아버지께 숙부가 반란군의 심부름을 한 것 때문에 도망하 려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424) 사건 당시 우치리에 살았던 참고인 장현철은 당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김연식과 주반계를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사건 당일 문장에서 1개 중대의 군인이 몰려왔습니다.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모정 앞으로 불러내고 반란군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몽둥이로 구타하였는데 저도 맞았습니다. 20 여리 떨어진 불갑산에 산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내려와 밥을 해주라고 하면 해주었습 니다. 김연식은 저보다 4, 5살 더 많았습니다. 군인들이 김연식을 먼저 총살하고 항의하는 김희일의 할머니를 총살하였습니다. 시신은 모두 현장에서 수습하였습니다.” 425) 신평리에 살았던 진일랑(다-6745)의 아버지 진옥진426)은 1949년 12월 17일(음력 10월 28일) 엄다면 엄다지서에 잡혀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신청인 진일랑은 아버지가 사망하 던 과정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할머니께 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을 자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함평군 위원장을 하시다가 농민운동을 하셔서 목포형무소에서 9개월 형을 살고 출소하여 집에 계 시다가 할머니와 함께 고모 집에 다녀오시던 중 열차에서 경찰에 잡혀서 엄다지서로 연행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엄다지서 부근의 주민에게서 전날 밤 10여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는 얘기를 듣고 조모께서 그 장소에 가셔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고 합니다.” 427) 당시 진상식, 진옥진과 같은 마을에 살았던 진용호는 “진상식과 진옥진이 활동을 하였 는데 진옥진은 건국준비위원회 함평군 책임자였으니 지금으로 하면 함평군수 정도였다. 424) 신청인 김희일 진술조서(2008.6.12.) 425) 참고인 장현철 진술조서(2009.6.15.) 426) 진옥진은 1932년9월경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 1946년4월3일 포고령 제 2호 위반죄로 광주지방법원목포지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1947년 2월 남로당함평군당위원 장으로 1947년6월5일 나산면 우치리 전단지 배포, 1948년1월31일 시위 등으로 포고 제2호, 형법 제60조, 동제55조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í��1948년 刑公單 第229號��, 1948.7.20, 광주지방법원목포지원. 427) 신청인 진일랑 진술조서(2008.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