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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50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민들을 다시 집결시킨 경찰이 시아버지와 양순기만 도로 변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시신은 얼마 안 되어 가족이 수습하였습니다.” 398) 가덕리 가리마을에 있으면서 임양욱과 양순기가 함평경찰서 유격대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던 주민 양남진은 임양욱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경찰 유격대가 주민을 집결시키고 임양욱을 불러내어 총살하였습니다. 임양욱은 당시 마을 이장이었습니다. 경찰이 임양욱과 양순기, 두 분을 끌고 가 양순기는 무사하였습니다. 도로변에 저희 밭이 있었는데 경찰이 그 밭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른들은 가까 이 갈 수 없었지만 저는 어렸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399) 3) 해보면 1949년 2월 21일(음력 1월 24일) 대창리 창서마을에 경찰이 들어와 정항수, 윤진병을 살해하였다. 창서마을에는 전날 경찰이 작전을 나왔다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경찰 6명 과 의용경찰대원 2명이 전사하였다. 400) 경찰은 다음날 이른 아침 이 마을에 다시 들어왔 다. 다음은 윤진병의 손자 윤석곤[다-5313(1)]과 정항수의 손자 정일성(다-6300)의 진술 이다. “할아버지가 1950년 3월 12일(음력 1월 24일) 401) 대창리 창서마을 뒷산에서 경찰에게 총 살되었습니다. 반란군이 자주 출몰하여 음식물 등을 가져갔는데, 경찰이 그 정보를 듣고 마 을에 왔다가 오히려 반란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경찰이 누가 반란군을 도왔는가 를 추궁하면서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으나 할아버지가 대답을 않자 총살하였습니다. 시신은 사건 후 가족이 수습하였습니다. 정일성의 할아버지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402) “1948년 3월 4일(음력 1월 24일) 403) 아침 경찰이 할아버지를 총살하였습니다. 사건 전날 398) 신청인 황금자 진술조서(2008.5.8.) 399) 참고인 양남진 진술조서(2009.4.24.) 400) “20일 석양에 함평 해보 지서원 6명과 의용단원 2명이 정보수집 차 창서부락에 출장 중 무장반도 약 80 명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하였는데 중과부적으로 불행하게도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급보에 접한 경찰 당국에서는 방금 응원대를 현지에 급파하여 필멸의 태세로 포위 중이다.” 「海保에 叛徒 80명」, 호남신문 1949.2.22. 401) 신청인은 윤진병이 사망일자가 1950년 음력 1월 24일이라고 하였으나 빨치산의 경찰습격이 1949년 2월 20일이라는 보도내용을 볼 때 사건 발생연도는 1949년으로 보인다. 402) 신청인 윤석곤 진술조서(2009.3.13.) 403) 신청인은 신청서상에는 1949년 1월 24일(음력)이라고 하였으나 진술조서 작성 시 1948년으로 진술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