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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47 갑산 용천사에 폭도들이 있었는데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오곤 하였다. 용천사에 있 던 무장폭도 몇명이 정탐하러 왔다가 군인인가 경찰인가는 모르겠지만 아군에게 패하여 도주한 적도 있다. 최병열이 군인들에게 잡혀 가서 죽었다는 말은 동네 분들에게 들었다” 고 진술하였다. 389) 송사리 주민 김채섭은 최병열이 군인들에게 살해될 무렵 출동하였던 군인들이 광주에 주둔하였던 제20연대 6중대라고 진술하였다. “여순사건 이전 처음에는 경찰이 작전을 나오다가 1948년 음력 8월부터는 군인들도 보이 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들어온 군인들은 광주에서 온 8중대였고 그 뒤로는 5중대와 6중 대도 자주 왔습니다. 6중대장이 저와 같은 광산 김 씨였습니다. 같은 집안이라서 베를 가져 다주라고 하여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던 함정리 구봉마을까지 갔던 적도 있습니다. 최정의 의 삼촌 최병열도 며칠 뒤 함정리 큰 묘소 앞에서 죽었습니다.” 390) 삼천동에 살면서 학교면 사거리 이모의 포목점에서 일을 도와주던 정병조(다-6739)의 형 정병선은 1948년 10월 22일(음력 9월 20일) 집에 다니러 오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신광 국민학교 뒤 우렁굴에서 살해되었다. 다음은 정병조의 진술이다. “형님은 학교 사거리 이모님의 포목점에서 일하였는데 삼천동 부모님께 오다 신광지서 앞에서 경찰에 붙잡혀 월암리 연천마을 우렁굴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신광지서에 잡아놓고 연락이 와서 아버지가 돈을 준비하러 마을에 오셨는데 그날 밤 죽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숙부님과 함께 우렁굴에 가셔서 형님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음력 8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최병열도 이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391) 정병선이 사망할 당시 정병선의 고향인 송사리 삼천동에 살았던 참고인 최정의는 정병 선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 정병선은 17살이었는데 함평에서 집으로 오다가 함평읍 하느리에서 신광지서 경 찰에게 잡혀 있어 가족이 면회를 다녔습니다. 얼마 뒤 경찰이 월암리 우렁굴에서 살해하였 고 신광지서에서 사망하였다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시신은 정병선의 아버지가 우렁굴에서 수습하였습니다. 그 무렵 반란군의 스파이 노릇한다고 군경이 젊은 사람들을 잡아가곤 하 였는데 제 삼촌도 사망하였습니다.” 392) 389) 참고인 이재순 진술조서(2008.3.5.) 390)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391) 신청인 정병조 진술조서(20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