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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45 은 마을에 살았던 정영일은 연행과정과 마을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정판진은 마을에 내려와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판진 부자가 경찰에게 구타당하고 없어졌는데 경찰이 밤중에 데려갔 다고 들었습니다. 그 무렵 경찰이 밤중에 와서 주민들을 연행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 후 정판진 부자는 동네의 50대 주민 몇 사람과 함께 학다리 둑에서 죽었습니다.” 381) 다. 한국전쟁 이전 사건 1) 손불면 학산2리 금곡마을 배정묵(다-4682)의 삼촌 배동원은 1949년 8월 7일(음력 윤7월 초) 함 평경찰서 손불지서로 연행되었다. 382) 배동원의 시신은 월천리 어전마을에서 수습하였다. 배정묵의 아버지 배동관도 1950년 7월 23일 보도연맹원으로 나산면 넙태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383) 또 같은 마을 김복만(다-5101)의 숙부 김병호도 1949년 8월 7일(음력 윤 7월 4일) 월천리 어전에서 살해되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신청인 김복만의 진술이다. “당시 함평 인근에 반란군이 많았는데 밤에는 반란군이, 낮에는 경찰이 와서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주민들도 낮에는 경찰 편을 들고, 밤에는 반란군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8월 28일 낮에 함평경찰 ○○○이 집으로 와서 숙부 김병호를 지서로 연행하다가 월천리 어전 뒷산에서 사살하였다고 합니다.” 384) 배동원과 김병호가 경찰 ○○○에게 연행되어 월천리 어전마을 뒷산에서 살해된데 대 하여 당시 마을에 거주하였던 참고인 배정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배동원과 김병호는 1949년 여름 두 사람이 같이 죽었습니다. 김복만이 김병호의 제사를 음력 7월 4일(양력 8월 27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좌익 배재만이 학산리에 산다는 것 만으로 주민은 경찰의 의심을 받았습니다. 배종수의 동생 배용길과 김병호의 큰형 김갑조가 월천리 어전마을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저도 같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385) 381) 참고인 정영일 진술녹취(2009.4.23.) 382) 신청인 배정묵은 배동원의 사망일이 1950년 7월초(배동관이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하기 보름 전)라고 하 였으나 참고인 배정문은 1949년 8월이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배정문 진술조서(2009.6.10.) 383) 신청인 배정묵 진술조서(2008.7.5.); 「전라남도 국민보도연맹사건 3(함평․해남․완도군) 결정서」 (2009.8.25.) 384) 신청인 김복만 진술조서(2009.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