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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43 “이계병을 동네에서는 이계춘이라고 불렀습니다. 월야면 영월리에서 오두치 계곡 빈집으 로 이사와 살았는데, 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좌익 활동을 하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경찰이 잡아가는 것을 쌍구룡 주막에서 술을 마시면서 보았는데, 얼마 뒤 주막 옆 공동묘지 에서 총살하였습니다. 경찰은 세 명이었는데 지서 주임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시신은 친 척이 수습하여 송산마을에 매장하였습니다.” 374) 다) 월야면 1950년 11월 28일(음력 10월 19일) 용암리 신성마을에 경찰이 들어와 주민들을 집결시 키고 김길호(다-3619)의 아버지 김동열 등을 연행하여 다음날 외치재에서 살해하였다. 사건에 대한 김길호의 진술이다. “김두원 375) 의 사위가 좌익 활동을 하였는데, 경찰이 그 사람을 잡으러 왔다가 없자 아버 지, 김두원, 장싹쇄, 그리고 김두원과 인척인 박화선을 잡아갔는데 박화선은 남편대신 잡혀 갔습니다. 아버지는 진다리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다가 잡혀갔습니다. 이날 연행된 분 중 박 화선을 뺀 나머지 분들은 다음날 새벽 외치재 부근에서 총살당하였습니다. 박화선은 일가 에 의경이 있어서 빠져나왔습니다.” 376) 당시 경찰에 의하여 월야지서까지 연행되었다 풀려나왔던 박화선은 경찰이 김동열 등 을 ‘좌익 활동’ 혐의로 연행하여 외치재에서 총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은 박화선의 진술이다. “김동열은 외치재 밑에서 죽었습니다. 나도 그 사람들과 함께 사건 전날월야지서로 연행 되었는데 김동열, 김두원, 성이 장 씨인 분 등 세 분은 다음날 외치재에서 경찰에게 죽었는 데 저는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시어머니 동생 윤문갑이 월야지서 경찰이었는데 그 분 덕택 에 그날 저녁 외삼촌댁으로 왔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다음날 새벽 외치재에서 죽었습니다. 시신은 각기 가족이 다음 날 외치재에서 찾아왔습니다.” 377) 374) 참고인 윤기병 진술조서(2008.8.22.) 375) 김두원과 장싹쇄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김두원의 경우 함평군 월야면에 제적등본 발급을 요청하였 으나 김두원의 제적등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회신이 왔으며 장싹쇄의 경우 후손이 없다는 김길호의 진 술에 따라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376) 신청인 김길호 진술조서(2008.6.11.) 377) 참고인 박화선 진술조서(2009.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