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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4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혔는가 어쨌는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마을에서 사라졌습니다.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학도병을 하였으니 누구를 괴롭히고 할 사 람도 아니었습니다.” 370) 광암리 운암마을 정영수(다-4420)의 숙부 정복현은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연맹사건이 났을 때는 살아남았다. 정복현은 전쟁이 일어나고 그 후 수복 무렵인 1950년 11월 초 경 찰에 연행되었다. 다음은 신청인 정영수의 진술이다. “저는 옆집에 살았지만 몸이 아파서 목격은 못하고 나중에야 함평경찰서 기동대가 숙부 를 연행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숙부 시신은 찾지 못하였는데, 1960년도에야 사망신고 를 하였습니다. 사건 무렵에는 빨치산이 밤에 와서 음식물을 가져간다고 경찰이 마을 수색 을 자주 벌였습니다.” 371) 보도연맹원 정복현의 희생사실에 대하여 정복현이 경찰에 연행된 사실에 대하여 참고 인 박용원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정복현은 한 마을에 살았는데 나이는 30대였습니다. 정복현은 수복 무렵에 죽었습니다. 정복현은 보도연맹원으로서 1950년 7월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을 죽일 때는 살아남았습니 다. 수복 후 광암리 주민은 대각리 오두치로 소개를 나갔는데 정복현은 소개를 나가기 직전 경찰의 출두 명령을 받고 나갔었습니다.” 372) 1950년 6월 27일(음력 5월 12일) 이정숙(다-3921)의 조부 이계병이 마을에 들어온 경찰 에 연행되어 대창리 쌍구룡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정숙의 진술이다. “저는 당시 4살이어서 사건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 여동생 과 같이 산내리 집에 있었습니다. 고모님께서 할아버지의 제사를 음력 5월 11일에 지내고 있어서 사망하신 날짜를 5월 12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동네 어른들이 수 습하여 산내리에 모셨습니다.” 373) 당시 상곡리에 거주하며 경찰이 이계병(이명 이계춘)을 연행하여 총살하는 장면을 목 격한 주민 윤기병의 진술이다. 370) 참고인 윤금중 진술조서(2009.6.17.) 371) 신청인 정영수 진술조서(2008.3.15.) 372) 참고인 박용원 진술조서(2009.6.18.) 373) 신청인 이정숙 진술조서(2008.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