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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40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원선리에서 월봉리 월평으로 소개를 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원선리 구장으로, 지서 에서 아버지께 장작을 해오라고 하여 형님이 대신 지서에 가져다주고 오다 나산지서로 잡 혀갔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함평경찰서로 이송 도중 구산리 상구동 앞에서 총살하였습니다. 형님과 안기남, 김해용이 돌아가셨습니다. 전날 월봉리 안영마을 뒷산에서 봉홧불이 올랐 던 것 때문에 기동대가 지방폭도를 잡으러 왔다가 연행하였습니다.” 361) 안기남, 김해용, 모우종 등과 같은 마을에서 살았으나 월봉리 안영동으로 소개를 나갔 던 참고인 정관욱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해용, 안기남, 모우종은 모두 이 마을에 살았습니다. 경찰의 명령으로 월봉리 관동으 로 소개를 나갔는데, 지서에서 땔감용 나무를 가져오라고 하여 갔다 오다가 경찰에게 연행 되었습니다. 나무를 가져다주고 석유를 사가지고 좁은 길로 왔는데 석유를 봉화를 피우는 데 사용할 것으로 봤던 것 같습니다. 구산동 모퉁이에서 죽였는데 시신은 수습하였습니다. 나이가 김해용은 1살 적었고, 안기남은 당시 40대였고, 모우종은 1살 많았습니다.” 362) 하루 전인 1950년 12월 27일(음력 11월 19일) 월봉리 안영동 도로변에 살았던 김영휴(미 신청)의 아버지 김복수도 집안에 들어온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음은 김영휴의 진술이다. “저희 가족은 고모부 정석주가 월봉리 안영동으로 나와서 살자고 하여 안영동으로 나왔 습니다. 그런데 그 가옥이 도로변에 있었습니다. 음력 11월 19일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 식구들은 방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마당에 계셨는데 경찰이 잠깐 어디를 가보자면서 데려갔 다고 합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광영마을 앞 삼거리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363) 김복수의 희생사실에 대하여 참고인 김경수는 “당시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에 살았는데 나산에 군인들이 들어오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곽원길, 이기옥, 노세창, 정종하, 김복수 364) 가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2, 3km 떨어진 천주봉에서, 정창근과 김복수는 경찰에게 연행되 어 사망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365) 진효남(다-6632)의 아버지 진상식366)은 1951년 2월 2일 나산면 신평리 도장골에서 나 361) 신청인 모종수 진술조서(2008.6.13.) 362) 참고인 정관욱 진술조서(2009.6.15.) 363) 참고인 김영휴 진술조서(2007.12.8.) 364) 곽원길, 이기옥, 노세창, 정종하, 김복수는 1950.10.28. 나산면 천주봉에서 국군에게 살해되었다. 진실화해 위원회, 함평수복작전민간인희생사건 진실규명결정(2008.4.14.) 365) 참고인 김경수 통화보고(2008.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