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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37 의용경찰 윤필중, 노병선 등에 대하여 신청인 김만수는 “윤필중은 용성리 정창에 살았 는데 부모가 지방폭도들에게 살해되었고, 노병선은 용성리 구룡동, 여차현은 금산리에 살 아서 알았던 사람이며, ○○○은 목포 출신으로서 형사였다”고 진술하였다. 349) 대동면사무소와 대동지서가 있었던 덕산리의 수복 상황에 대하여 당시 학도경찰 이돈 석과 의용경찰이었던 송영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대동지서장은 김근진 경위350) 였습니다. 덕산리에 경찰이 진주할 무렵에 지방폭도들이 덕산리를 자주 습격하였습니다. 인민군 점령기에 분주소장이나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사람 들도 경찰 진주 이후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은 대동지서에 근무하였던 사찰형사였 습니다.” 351) “1951년 초 대동지서에 발령받아 간 뒤 얼마 있지 않아 입산자 가족을 경찰이 데려와 조 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대동지서 형사가 그 사람을 조사하였습 니다. 가족 중 입산자가 있어서 경찰이 연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352) 이보다 앞서 1950년 12월 24일(음력 11월 16일) 덕산리 내덕마을 김용구(다-7997)의 아 버지 김인수, 어머니 박해남은 대동국민학교에 집결한 상태에서 경찰이 선별하여 고산동 안골에서 총살하였다. 김인수와 박해남 부부가 경찰에 선별되어 살해된 사건에 대하여 신청인 김용구의 진술 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한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어른으로서 인명을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답니다. 그 무렵 경찰 ○○○의 가족 7명이 좌 익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경찰에게 선별되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353) 덕산리 주민 김인수 부부가 경찰에 살해되던 당시 덕산리 주민 김영률은 이 사건에 대 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인수는 50세 전후였는데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등 전형적인 선비였습니다. 아 348) 참고인 김종남 진술조서(2009.4.2.) 349) 신청인 김만수 진술조서(2007.11.2.) 350) 1950년 12월 1일부터 대동지서장은 김근진 경위였다. í��인사사령부��, 전라남도 경찰국, 1950. 351) 참고인 이돈석 진술조서(2009.4.2.) 352) 참고인 송영문 진술조서(2009.8.5.) 353) 신청인 김용구 진술조서(2008.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