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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34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사건 4, 5일 전부터 밤손님들이 ‘경찰이 진주하면 모두 죽인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호정마을에 피난하고 있다가 저녁에 내려올 때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보았습니다. 김 봉규와 손소하기는 ‘큰묵전’ 밭 아래에서, 양동댁(최양례)은 그 아래 부근에서, 김광열은 함평 -나산 간 도로에서 보았습니다. 시신은 다음날 각자 수습하여 선산에 매장하였습니다.” 336) 경찰은 1950년 11월 27일 강운리 송산마을에 진주한 뒤 주변 백호리, 덕산리 인근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같은해 12월 5일에는 송산마을 인근 곡산마을에 살았던 곽판옥(다-3627)의 부 곽인수, 임주환(다-3634)의 아버지 임용택과 당숙 임진택이 경찰에 연행되어 사망하였다. 곽판옥 과 임주환의 진술이다. “아버지 곽인수가 1950년 12월 5일(음력 10월 26일) 대동면 강운리-백호리 간 공동묘지에 서 경찰의 구타로 사망하였습니다. 같은 마을 임주환의 아버지 임용택과 당숙 임진택도 그 날 사망하였습니다. 아버지 사망과 관련하여 어머니께 들었는데 아버지가 함평읍 외가에 다 녀오다가 향교다리에서 한청대원들에게 붙잡혀 용모골 공동묘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337) “사건 며칠 전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젊은 사람을 한청본부로 연행하였는데 백호리 넘어 가는 야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곽판옥의 아버지 곽인수도 이날 연행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같은 마을 ○○○이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이 되었는데 경 찰이 이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지목하는 사람을 데려갔다고 들었습니다.” 338) 함평읍 향교다리 부근에서 대한청년단원에게 붙잡혀 강운리 뒤 공동묘지 부근에서 구 타로 사망한 곽인수, 임용택, 임진택, 그리고 최계오의 아들 339) 등의 희생사실에 대하여 손봉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송산마을에는 경찰과 유격대가 음력 10월 18일 처음 들어오고 다음날 향교마을로 소개 시켰습니다. 그 후 10일 정도 지나서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곽인수, 임용택, 임진택 등은 향교로 소개 나갔는데 유격대에 붙잡혀 백호리 용모골 공동묘지 부근에서 총살당하였습니 다. 마을에 ○○○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면 경찰이 잡아갔습니다.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습니다.” 340) 336) 참고인 김진배 진술조서(2009.4.2.) 337) 신청인 곽판옥 진술조서(2008.5.22.) 338) 신청인 임주환 진술조서(2008.8.22.) 339) 함평군 대동면으로부터 최계오의 제적등본을 제출받아 최계오 아들에 대하여 신원을 파악하였으나 확인 할 수 없었다. 대동면-9039(200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