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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29 머니가 아버지의 행방을 찾던 중 함정리 분들과 연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동네 분 들과 계월마을 까마귀머리산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부근에 매장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함 께 연행된 사람은 강대원, 그리고 김맹근의 형님 등이었습니다.” 308) 라) 원산리 원산리는 해보면과 신광면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빨치산사령부가 있었던 용천사와는 2km 남짓 떨어져 있어 빨치산 출몰이 잦았던 지역이다. 경찰은 원산리에 진주하면서 주 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키고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자를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경찰은 사건 이후 원산1리, 2리를 소개시켰는데 주민들이 피난을 나가다 경찰의 검문에 걸려 살 해된 경우도 있었다. 1950년 12월 3일(음력 10월 24일) 점심 무렵이 지나서 경찰이 대한청년단원 20여 명과 함께 원산리 원남마을에 진주하였다. 경찰은 면소재지에서 학동, 덕동을 돌아 다시 학동마 을에 와서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 집결시켰다. 309) 경찰은 가지고 온 명단을 보고 주민들 속에서 젊은 사람을 불러내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신청인 이춘만(다-1532)의 진술이다. “경찰이 학동과 덕동 주민 100여 명을 집결시키고 책임자인 박용주를 찾았는데 박용주는 이미 숨어버린 뒤라서 학동마을 서기였던 저의 형 이대근이 나갔습니다. 경찰은 집결한 주 민 중 덕동마을 전무남, 310) 김기병, 311) 천기순, 312) 김종수 313) 등 5명을 불러내어 원남 방향 으로 데려갔고 남은 주민들은 돌려보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내일 신광지서 쪽으로 이사 를 하라’고 한 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습니다.” 314) 원산1리 원남마을 서영순(다-1531)은 시당숙 전무남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스무 살에 시집을 와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께 들었는데 돌아가신 시당숙은 해보 관립학교를 다닌 분인데, 경찰이 마을에 와서 젊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죽일 때 함께 죽였다고 들었다. 사 건 이후에 경찰이 다시 왔는데 그때는 부역 여부만 묻고 돌아갔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 308) 참고인 김병섭 진술조서(2009.6.14.) 309) 신청인 이춘만 진술조서(2008.5.7.) 310) 신청인 서영순(다-1531)의 시당숙 311) 신청인 김영화(다-2235)의 숙부 312) 신청인 천동연(다-2295)의 아버지 313) 김종수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김영태(金永台)로 기재되어 있었다. 참고인 김영이 통화보고(2009.8.31.) 314) “학동 김종수는 조직부장, 전무남은 덕동마을 세포위원장, 김기병은 조직부장, 천기순은 목수로 면소재지 에서 덕동까지 왔다고 경찰이 연행하였습니다.” 신청인 이춘만 진술조서(20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