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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21 진술이다. “군유산 반란군의 명령으로 보초를 서면서 경찰의 진주를 목격하였는데 경찰이 오전 10 시경 마을에 왔고, 반란군도 비슷한 시간 송사리까지 왔었습니다. 그날 경찰은 노증산 방향 으로 왔고, 반란군은 송사리 뒷산에서 왔습니다. 저는 여동생 순자, 판례는 집에 남겨둔 채 조모님을 모시고 부모님과 같이 군유산으로 갔습니다.” 273) 안순자와 안판례의 사망에 대하여 같은 마을 참고인 임종연은 “해안마을 뒷산 봉우리 에서 반란군과 경찰의 교전이 있었는데, 교전 후 경찰은 해안마을 에서 자기들에게 총을 쏘았다고 오해하고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질렀다”고 진술하였다. 274) 안의순이 군유산에서 내려왔을 때 안순자와 안판례의 시신은 이미 불에 탄 상태였는데 안의순 형제가 수습하 였다. 275) 해안마을 윤수봉(다-3640)의 어머니 김금순도 1950년 12월 12일에 마을에서 경찰의 총 격에 사망하였다. 윤수봉의 부모는 손불면 월천리가 고향이지만 일 때문에 해안마을에 계셨고 윤수봉은 월천리에 있었다. 윤수봉의 진술이다. “아버지 윤한원은 산사람들이 시켜서 마을 앞 산봉우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고, 남동생 은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이라 집안에 계셨는데 경찰이 마당까지 들 어와 쏜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네 살짜리 여동생은 집안에 두고 갔었는데 이불속에 숨겨 놓 아 목숨을 건졌습니다.” 276) 이 사건에 대하여 참고인 이재현은 “윤수봉은 죽암리 석령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손불 면 월천리 저수마을에서 살았다. 윤수봉의 가족은 사건 무렵 어머니가 임신 중인 상태에 서 신광면 송사리 2구 해안마을로 이사를 갔었는데 그곳에서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윤한원으로부터 시신은 해안마을 앞에 매장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277) 1950년 12월 이전에는 백운리 신기마을에 살았으나 사건 무렵 송사리 해안마을에 거주 하였던 김중신(다-7287)의 조부 김판동은 1950년 12월 12일 작전을 나왔던 경찰의 총격 에 사망하였다. 김판동의 며느리 이춘재는 시아버지 김판동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273) 신청인 안의순 진술조서(2008.4.23.) 274) 참고인 안영환․임종연 진술조서(2009.3.5.) 275) 신청인 안의순 진술조서(2008.4.23.) 276) 신청인 윤수봉 진술조서(2008.5.6.) 277) 참고인 이재현 진술조서(200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