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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18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다) 죽장․죽암리 죽장리 수철마을 서갑열(다-2863)의 아버지 서영상과 삼촌 서유상은 1950년 12월 6일 (음력 10월 27일) 마을에서 경찰에 의하여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로 연행되어 3일 후인 12월 9일 살해되었다. 261) 신청인 서갑열은 “아버지가 전쟁 전에 손불지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라 하여도 가입 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경찰이 아버지 형제를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262) 서영상 형제의 사망에 대하여 참고인 김재원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서영상은 제 아버지께 한자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분은 죽장리 수철자신의 집에 숨었 다가 경찰에게 잡혀 신광면 월암리 노리개재에 3일 간 있다가 까마귀머리산에서 돌아가셨 습니다. 그날 마을에서 연행된 사람은 형제뿐입니다.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여 동암리 동백 마을 뒷산에 모셨습니다. 서영상 형제를 연행한 사람은 경찰 쪽에서 활동하였던 ○○○입 니다.” 263) 죽장리 장동마을 김영태(다-3639)의 아버지 김남보는 1950년 12월 9일(음력 11월 1일) 마을 앞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살해되었다. 신청인 김영태는 김남보의 사망사실에 대하 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경찰 3, 4명과 죽창부대 20~30명이 석령마을을 수색하러 왔는데 그때 아버지는 장동마 을 대밭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내려 대밭에 발자국이 남았고 죽창부대가 발자국을 보 고 따라와 마을 앞에서 아버지를 총살하였습니다. 아버지 유해는 장동 주민이 알려주어 수 습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지방좌익과 경찰유가족이 서로 모략하고 죽였는데 아버 지도 모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264) 김남보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실에 대하여 참고인 유대홍은 다음과 같이 진 술하였다. “김영태의 아버지 김남보가 사망한 날은 경찰과 대창부대가 진주한 날이었습니다. 김남 보가 죽장리 장동마을로 가다가 경찰과 대창부대를 보고 놀라 눈밭으로 도망하였고 대창부 대가 뒤따라오자 장동마을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을 본 경찰과 대창부대가 총을 쏘았 261) 신청인 서갑열 진술조서(2008.5.6.) 262) 신청인 서갑열 진술조서(2008.5.7.) 263) 참고인 김재원 진술조서(2009.3.18.) 264) 신청인 김영태 진술조서(2008.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