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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제2소위원회 사건(4)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17 진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경마을 박광수(미신청)의 아버지 박영규는 1950년 12월 12일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8살이었던 박광수의 진술이다. “아버지가 그날은 오전 일찍부터 피난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후에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저에게 ‘아버지 옷을 챙겨서 따라 오라’고 하여 어머니를 따라 군유산 칡재에 갔 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여 현장에 매장하고 유품을 가지고 밤늦 게 내려왔습니다. 아버지 시신이 있던 부근에 박영태의 할아버지 박두식과 박상규의 할아 버지 박내언의 시신도 함께 있었습니다.” 257) 1950년 12월 12일(음력 11월 4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차경마을에서 경찰의 진주과정 을 목격하였던 주민 안영환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제가 그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내려오면서 보니 박영규의 부인이 울고 있어 그 곳에 가보니 박영규가 총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분은 그날 아침 일찍 저에게 이발을 하 고 나갔는데 삼천동으로 넘어가는 고랑에서 북성리 방향으로 진입하는 경찰의 총격을 받았 습니다. 박영태와 박상규의 할아버지도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 분이 함께 있었 는데 이 분들이 피신하였던 곳은 경찰이 진입하면서 보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258) 박영태(미신청)는 할아버지 박두식의 사망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군유산 기슭 칡재에 서 돌아가셨다.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주민들을 귀찮게 하였는데 그날도 경찰이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는 박내언, 박영규 등과 군유산 방향으로 피난을 가셨다”며 “할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때 보니 옆구리에 총을 맞은 상처를 보았다”고 진술하였다. 259) 박상규(미신청)도 할아버지 박내언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소를 귀한 재산 으로 생각하셨는데 그날도 소 때문에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가까운 칡재로 가셨다”며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니 수소문하여 칡재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동네 어른 두 분이 함께 계셨다”고 진술하였다. 260) 박영규, 박두식, 박내언은 신광 경찰고지에서 출발한 경찰이 진입하면서 총격을 가하자 군 유산 칡재로 피난을 하였는데 셋이 함께 있다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57) 참고인 박광수 진술조서(2008.8.8.) 258) 참고인 안영환 진술조서(2009.5.26.) 259) 참고인 박영태 진술조서(2009.6.13.) 260) 참고인 박상규 진술조서(2009.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