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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14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농업용수로에 오후 5시까지 숨어 있었습니다. 이후 반란군은 빠져 나가고 주민들만 남았는 데 이때 숙부 모양선도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12월 12일 뒤에는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잡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경찰 유가족 등 경찰 편에 선 사람들도 마 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243) 모량마을 모종채의 아버지 모일기도 1950년 12월 12일(음력 11월 4일) 경찰이 진주하 자 주민들과 함께 상막재로 피난을 갔다. 모종채의 처 심순례244)는 “결혼 후 시어머니께 시아버지의 사망사실을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싸움 한 번 안 하는 분으로 억 울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245) 그날 산남리 강석마을 박래길의 가족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종가인 양재리 장재마을 에 갔다가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다음은 신청인 박래길의 진술이다. “음력 11월 3일(양력 12월 11일)에 제사가 있어 아버지 박진구 등 집안 어른들이 양재리 장재동 종가에 모였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소탕작전을 나왔고, 아버지는 도망가다가 경찰 총에 맞았습니다, 또 종조부 박균경 246) 과 아들 박섭구는 체포되어 현장에서 살해되었는데, 박섭구는 살아났습니다. 그날 함평경찰서 기동대가 들어왔으며 함평경찰서로 연행된 분도 있습니다.” 247) 함평경찰서 기동대원에게 살해된 박진구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4촌 동생 박예구는 다음 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손불서국민학교 3학년으로, 양재리 장재동에 살았고 사촌형님 박진구는 산남리 강 석에 살았습니다. 음력 11월 3일이 할아버지 기일인데 사촌형님은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경찰 총격에 사망하였습니다. 사촌형님은 경찰이 진주하는 것을 보고 놀라 도망하다 경찰 의 총격에 사망하였습니다.” 248) 모량마을 모성만의 전모(前母) 김소금과 누나 모복님도 1950년 12월 12일 양재리에 경 찰이 처음 진주한 날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신청인 모성만은 “두 분 모두 시신은 243) 신청인 모종두 진술조서(2008.5.20.) 244) 신청인 모종채는 2006.10.6. 사망하여 신청인의 처 심순례가 대신 진술하였다. 손불면-5166. 245) 신청인 심순례 진술조서(2008.5.20.) 246) 박균경의 사망사실을 제적등본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단기 4283년 11월 3일 오후 4시 본적지에서 사망’ 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조사4팀-998. 247) 신청인 박래길 진술조서(2008.6.24.) 248) 참고인 박예구 진술조서(2009.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