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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전사케 한 후 자신들이 승리했다며 만세를 부르는 소동을 피웠던 것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1η 신청인 서백수는 이 마을 거주자 중에 빨치산 활동을 한 김 00 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주민이 피해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사건 당일 김 00은 마을에 있지 않았다 1히 5중대에는 G-2라 불리는 민간정보원들이 있어 주민의 동향을 파악해 서 중대에 보고하였는데19) 이들은 마을의 좌익활동 내용도 그대로 보 고하였을 것이다. 4)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서촌마을 사건 서촌마을은 해보면과 장성군 삼서면 간 도로변에 있는 마을이다- 1950년 12월 6일 5중대 군인 일부는 서촌마을을 거쳐 동촌마을로 갔 다. 신청인 이덕부의 부 여연범은 그날 아침밥을 먹을 무렵 5중대 군 인 2/ 3명에 연행되어 끌려가다 총살되었다고 진술했다. 신청인 이재하 는 자신의 아버지 이판금이 서촌마을 인근인 윌야면 용암리 연화마을 에 살고 있었는데 사건 당일 중대본부가 있었던 해보면 문장으로 가다 서촌마을 부근에서 5중대 군인들에게 붙잡혀 총살되었다고 하였다 2이 5) 장성군 삼서변 수해리 사건 장교/ 동촌l 서촌마을 등에서 각각 i작전/을 끝낸 5중대는 해보 장성 간 24번 도로를 따라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과 장성군 삼서변 방향으 로 계속 전진해 갔다. 그날의 상황에 대해 참고인 임화수는 이른 아침 부터 월야면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주 민이 “이렇게 았는 것보다 군인들을 환영하는 것이 낫겠으니 환영가 자”고 제안하여 국군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고 진술하였다.21) 그러나 5중대는 마을에 들어와 곧바로 집과 벗단에 불을 질렀으며 17) 곽상순 증언, 김영택Ii"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11 , 사회문화원, 2001, 96쪽. 18) 신청인 서백수, 진술조서 7쪽, 2006. 7. 25. 19) 참고인 이녹범, 진술조서 4쪽. 2006. 12. 13. 20) 신청인 이재하, 진술조서 3쪽. 2006. 8. 22. 21) 참고인 임화수, 진술조서 2쪽. 2006. 6. 7. -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