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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충청·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⑧ 김규식 김규식(金奎植, 1882∼1931)은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육군 부교로 육군연성학교에서 근 무하다가 음력 1906년 10월경 퇴직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육군 정위 현덕호와 함께 의병을 계획하고 양주의 허위 부대를 찾아가 합류하였다. 이인영 부대에 도 합세하여 연천·마전·삭령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체포되어 1908년 8월 25일 유형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는 등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1923년 5월에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 사령에 선출되어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김혁(金赫) 등이 북구(北溝) 영안현(寧安縣)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 다. 그러나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독립군의 호랑이 장군’ 김규식은 공 산계열의 동족에 의하여 이역 땅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 장을 추서하였다. ⑨ 정철화 정철화(鄭哲和, 1878∼1943)는 서울 서부의 신문 밖 출신이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와 한국군의 해산을 계기로 유생 신분으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허위(許蔿) 휘하의 관서 창의군 방인관 부대에 들어가 서기(書記)로서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二毛山) 일대에서 일본 군과 교전하였다. 또 전병규(全炳奎) 의병부대에서 ‘30명 의병 지휘관’이 되어 안성군 죽산면 칠장사(七長寺)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안성에서 군자금 수납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 남대문 사축동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다가 1907년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1908년 5월 29일에 경성지법에서 유형 15년을 선고받았다. 1913년 9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의 일원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 내각 총리대신·조선총독 등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집 운동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