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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주었던 근왕정신이 한말 의병에서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이라는 민족문화의 주체적 논 리가 추가되면서 민족자존적 정치문화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한말 의병은 비록 초기 단계에는 유학자가 중심이 되어 반침략·반개화 항쟁을 전개하였 으나, 점차 민족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여기에 농민과 포수, 심지어는 동학교도까지 합세하 여 민족적 대항전을 펼쳐 갔기에 의병 항쟁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후기 의 병에는 척사사상보다 반개화성, 특히 반봉건성이 더 나타난다. 의병 항쟁을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도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보이지만, 이를 ‘의병적’이라고 할지언정 의병이라 하지는 않는다. 비록 동학농민군들이 자신들을 ‘충의군’이라고도 불렀을지라도, 동 학의 항일운동 이념은 동학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학은 의병운동이라기보다는 반봉 건적 사회개혁 또는 혁명운동의 차원에서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 또한 1894∼1895년간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민군을 편성하였다. 갑오의려(甲午義旅) 또는 유회군(儒會軍)이라 불리는 민군은 자신들을 의병이라고도 불렀다. 안중근의 공초(供招)를 보면 조부가 의병장이었다고 기록되었는데,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갑오의려는 관군 또는 일본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과 항쟁하였으니, 항쟁의 대상이 외세가 아닌 동학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또한 의병과 구분된다. 민란에 참여한 세력도 그러하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비록 충의군적인 성격을 띠었 다 하더라도 투쟁 대상이 관군이었으니 이들도 의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의병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병적 성격’ 또는 단순히 ‘정 의의 군대’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 의병’과 임란과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주자학 사상의 충 의정신에 기초하여 무장 투쟁한 ‘역사적 개념으로서 의병’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2) 한편 한말 의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의병사의 체계화를 위한 시기 구분법으로는 2 시기 구분법, 3시기 구분법, 4시기 구분법 등이 있다. 위 구분은 시간의 원근, 봉기 원인의 차이, 참여층의 변화에 따른 의병 부대의 성격 차이 등을 기준으로 시도되었다. 2시기 구분법은 을미의병을 전기 의병으로, 을사·정미의병을 후기 의병으로 구분하는 것 으로, 주로 시간의 원근과 주도 세력의 성격 차이 등으로 나뉜다. 3시기 구분법은 그간 주 로 이용되던 방법으로 의병 연구의 효시라 할 뒤바보의 「의병전」에서 비롯되었다.3) 이 구분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04쪽. 3) 뒤바보, 「의병전」, 『독립신문』, 상해, 1920년 4월 27일∼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