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page

32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 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 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쳤다. 다음날 의진은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 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의병진은 화성의 합천(지금의 청 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듣고 공주 주재 일본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 군과 함께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인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오전 5시에 이들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어,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합천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는 친 척 민진석(閔晉錫)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곧이어 이용규가 초 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용규는 합천 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진안·용 담·장수·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 티로 와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한 것이다. 민종식은 다시 대장에 추대되어 부대를 정비하였다. 민종식은 이때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 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 하였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을 거쳐서 5월 13일(음력, 4월 20일)에 서천읍에 도착 하였다. 의병은 남포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 여 요새인 남포성을 의지하여 반격하였다. 5일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의병부대는 남포성 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유회군 33명 도 영입하였다. 홍주의병은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가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 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 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였다. 5월 21일 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 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