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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는 이인영 집에서 향회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김복한은 별도로 이봉학·이상린과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 봉학·이세영·김정하 등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와 숨었 다. 12월 2일에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 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여기에 안병찬·채광묵의 민 병 180명이 대기하였으니 그 군세는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김복한은 12월 2일에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관찰사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경무사 강호선과 참 서관 함인학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민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관찰사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의에 참여할 것 을 승복하였다. 이어 ‘존화복수(尊華復讐)’라 쓴 기를 세우고 거의 방법과 계략을 협의하였다. 다음날(12월 3일) 홍주성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군과 홍주군내 27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 와 독자를 빼고 매호마다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하였다. 집집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죽을 것을 맹세하고 자진 응모하였다. 한편 관찰사 이승우는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 로 절제사에게 관내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게 하였으며, 이설을 불러 장 계 및 각국 공사관에 조회하는 격문을 작성토록 하였다. 창의소에는 김복한과 이설·안병찬·이상린이 잔류하였으며, 의병 초모와 산성 수리를 위 하여 송병직·채광묵·이창서·이세영·이봉학·이병승·조의현·박창로·정제기 등을 파 견하였다. 이로써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비로소 진용을 갖추었으니, 기병이 성립하기 까지는 1895년 4월부터 8개월에 가까운 준비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하여 포군 500명과 화포 1천 자루 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에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부터 의리에 따라 죽을 마음이 없었다.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의병에 참여하 기는 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한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복한 등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았 다. 12월 30일에 수감자 23명은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1일 신 례원에 도착하는데 이때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다시 홍주감옥에 구금되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