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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로 인해 러·일 전쟁 개전 이래 쌓였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반대 집 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기 의병은 1904년의 한·일의정서 체결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1904년 5월에 허위(許 蔿)의 이름으로 작성된 격문이 13도에 발송되었으며, 김동수(金東壽)의 황성의병소와 홍천의 병소의 격문이 발견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9월에 러·일 강화조약이 조인될 무렵부터 더 구체적인 전개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원주의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의 기의가 주목된다. 중기 의병은 1905년 11월의 을사5조약의 늑결로 격화되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 중 미국 과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조선 침략에 대한 사전 묵인을 받았다. 이어 러·일 전쟁의 승리로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조 선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1905 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라는 자격으로 파견하고 한일협약안을 정부에 제출하며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은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내각은 조약 체결을 정식으로 거부하였으나, 이토가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승인을 받아냈다. 여 기에 서명한 대신은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으로 이들을 ‘을사오적’이 라고 한다. 그리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재가를 강요한 다음, 그날로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 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하게 했다. 조약은 모두 5개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가 행사하고, 그 일을 맡아 볼 통감부를 서 울에 두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 에 있던 조선의 외교기관은 전부 폐지되었다. 동시에 영국·미국·독일 등의 조선 주재 공사 들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 로 이토가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도 직 접 우리 정부에 명령하고 집행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이에 유생과 전직 관리들이 극렬한 상 소 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영환·조병세 등 뜻있는 인사들은 죽음으로 써 조선의 주권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이근택·이완용 등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의열 투쟁 도 일어났다. 을사5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은 전국적으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 일어나 대표적 인 의진(義陣)으로는 홍주의진·산남의진·태인의진 등이 있다. 2. 의병의 역사적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