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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0월31일 월요일 7 (제118호) 관향조 종친회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위원장박래식(010-7169-9140) △상근부위원장박상범(016-481-6552,국당공파) △부위원장 문림랑공파박진식(010-2290-1889,대구시)/난계공파박진하(010-4907-6936,옥천읍)/ 이요당공파박희삼(010-5402-153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진주시) ○난계공파박원하(적명 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 니 단기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 존 될수있도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 족보상식에 밝은 어른들이 작고하면서 이번대동보가 마지막 족보가 될 우려 가있어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 바 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무숙공파 문중 선조 유적지 순례행사 가 우 리 종 중 운 영 의 새 로 운 모 델 을 제 시 하며 참석한 종원 모두의 뜨거운 관심 속 에마무리되었다. 지난 8일 하루 동안 진행된 선조유적지 순례 행사는 종원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타 종중에서 볼 수 없었던 종원들의 참여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집행부의 종중 운영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우선 변화를 모색하며 새 로운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든 종중에서는 변화를 싫어했고, 관습 을 중용한 반면 무숙공 문중의 정규 회장 과 권곤 간사를 비롯한 집행부는 매사에 적극적으로 종원들을 설득하며 몸소 실 천을 보여주며 젊은 청년들을 적극적으 로종사에참여시켜왔다. 우리 종중은 지금까지 나이 드신 어른 들의 봉건적인 사고와 다소 폐쇄적인 운 영을 고집해오면서 정작 우리 아이들은 종중에 관심이 없다며 미리 예견하고 가 르치지 않은 반면 무숙공 문중에서는 청 년들에게 보학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선 조님의 행장이나 보학자료를 소책자로 만들어 배포하고 틈만 나면 반복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이끌어 와 이날 행사에 도 3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화기애애 한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신선함 그대로 였다. 이에 본보에서는 무숙공 문중의 선조 유적지 순례행사에 동행취재를 해 보았 다. 오전 8시 30분 함안군 산인면 청금재를 출발 밀양 영남루 밀성대군단소를 참배 하고 밀성재로 이동 익성사 참배 후 진국 대종회장과 원환 수석부회장의 환영 속 에밀성재에서준비한다과를함께했다. 진국 회장은 이 자리에서 밀성재 현황 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을 촉 구했다. 이후 밀양 부북면의 사재감정(휘 홍 신)의 묘소를 참배하고 권곤 간사로부터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사재감정공은 영 남학파의 종조(宗祖)로 명성을 떨친 점 필재 김종직의 외조부이기도 한다는 설 명에 참석한 종원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 으면서자부심을갖는듯하였다. 사재감정공은 형(휘 언충)과 더불어 대마도 정벌에 나섰으며, 이망군(尼忘 郡) 전투에서 순직하여 외동딸을 선산김 씨 문중에 출가해 대대로 외손봉사가 이 어졌다. 오전 12시 점필재 김종직 생가를 방문 하여 선산김씨 가문과 밀양박씨 영동정 공파 가문에 대해 설명하고 근처 정자에 자리하여 준비한 다과를 함께하며 친목 을도모했다. 오후2시 대산면 용화산 선영에 들러 임 진왜란에 백의로 창의하여 공을 세운 동 천공(휘 旿), 임란의병장 무숙공(휘 진 영),영남학파의 거두 만성공(휘 치복)의 묘소를 참배하고 준비한 오찬을 함께하 며 오 전 일 정 을 더 듬 어 본 다 . 오후 4시 함안군 여항면 여항리 선영에 영동정공의 11世 휘 경원, 경현 형제분의 묘소 참배 후 야생 멧돼지의 습격으로 봉 분이 파헤쳐진 것을 목격하고 빠른 복구 를결의했다. 오후 5시 첫 출발지인 산인면 청금재에 들러 무숙공 부조묘 참배에 이어 선조님 의유품을소개하는시간을가졌다. 이 자리에서 정규 회장은 “사람은 누 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올 곶게 살아 자녀들의 미래의 삶에 본 보기가 되 고자 할 것입니다.또한 자년들은 부모의 사랑과 노력의 결정체로 국가와 지역사 회 및 가족이 바라는 동량이 되고자 노력 해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조상과 부모의 은혜를 알고 훌륭한 인격체로 다듬어 사 회의 구성원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라며 이날 유적 지 순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옛 말 에 부 모 없 는 자 식 은 없 고 , 조 상 없 는 후 손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상의 은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 으로 길러지고 성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생명체를 탄생시키고,한 세대를 지나 조 상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그러므로 우 리들의 삶에 숭조(崇祖)의 정신은 중요 한 지표인 것입니다.”라며 숭조를 강조 했다. 이어 행사에 참석한 가족을 소개하고 청소년들에게문화상품권을선물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 참배 예절과 정성,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많은 사람들의 귀 감이 되어 타 문중과 많은 비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인 이날 행사 강평에 는 다 음 행 사 를 묻 는 질 문 이 이 어 진 가 운 데 향후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을 할 것이 라는 집행부의 발표에 년 2회로 수정제의 하기도 해 종원들의 성의와 열정을 읽을 수있었다. 무숙공파 문중에서는 선조인 무숙공의 학술발표회를 수차에 걸쳐 시행하면서 선조님 현창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우리문중의롤모델이되고있다. 밀양박씨영동정공后무숙공문중선조유적지 순례성료 관광버스2대에나누어타고온 순례단이 밀성대군단 참배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익성사참배후관계자 로부터설명을듣고있다. 밀양 부북면의 사재감정공 묘소에서 준비한 제 물을진설하고있다. 점필재 선생 생가 밑 정자에서 준비한 간식을 함 께하며친목을다지고있다. 동천공 묘역에서 권곤 간사로부터 지난해 이장 과 정을 설명듣고 있다. 무숙공 부조묘를 참배하고 있다. 이날 우천으로 인해모두입배(入排)를하고있다. 밀양박씨 12중조의 한분으로 고려조 영동정(令同正)휘 원광 (元光, 시조 42世)을 중시조(파조)로 한다. 영동정공파의 역사 는 1497년 간행한 이존록(彛尊錄)에근거한다. 이존록은 영동정공의 7세손 휘 홍신(弘信)의 외손자인 점필 재 김종직 선생이 지은 아버지의 전기로 부록에 외조사재감정 박공전(外祖司宰監正朴公傳))과 어머니 행적 선비박영인행장 (先삽朴令人行狀)에서 외조부의 7대조 영동정공(휘 원광)가지 의 선계(先係)를 기록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1741년 편찬한 신 유대보에밀양박씨12중조의한분으로영동정공을중시조로기 록하였다.중시조이하6세손까지는고려조에벼슬을하면서개 성에거주하였다. 7세손 휘 언충(彦忠)은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경상좌도절제 사를 역임하면서 밀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아우 홍신(弘信)은 1 419년 대마도 정벌에 중군·좌군 병마사로 참전하였으며, 이망 군(尼忘郡)전투에서순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로 점필재 선생의 측근이 큰 화를 입게 되었 는데 외척관계로사화를피하여10세손 휘경원(景元),경현(景 玄) 형제분이 벼슬을 버리고 밀양 구령리에서 함안 여항 두곡 (외암)으로 은둔하였다. 그 후로 영동정공 후손들은 함안을 중 심으로하여뿌리를내리게되었다. 14세손 동천공(휘 旿)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 병(義兵)을 모아 아들 진영(震英)에게 김해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고 자신은 단성현(丹城縣, 경남 산청군 단성면) 으로 달려가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1594년 전란중에 작고 하였다. 15세손 무숙공(휘 진영)은 24세때에 창원 광산사에서 독서중아버님과창의하여김해성으로가서왜적을물리치는데 앞장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도원수 권율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전란7년간의전공으로선무원종공신3등에책록 되었고, 1599년 용궁현감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명나와 청나 라의 교체시기에 조선의 서북방을 방어하는 장수로서 중책을 맡았다. 1624년 경흥도호부사 재임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영변에서 난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남하하 여 궁궐을 점령하여 인조는 공주로 파천(播遷)을 가게 되었다. 이에 무숙공은 반란군 진압에 별장으로 출전하여 이괄의 군대 이윤서 장군과 밀양하여 병사 3천명을 귀순토록하였고,궁궐에 난입한 반란군을 정충신,남이홍 장군과 더불어 서울 인근 신교 (新橋,길마재)로 유인하여 대파하였다. 무숙공은 사전에 두 아 들 유룡,임용은 신교에 매복케하여 퇴로를 막고 반란군을 섬멸 하여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삼부자가 진무원종 공신1등에책록되었다. 그후 무숙공은 창원 광려산 별서(別墅)로 낙향하여 금서(琴 書)를 벗삼고 후학을 양성하던중 1626년 병조참판에 제수 되었 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에 무숙공은 68세 (歲)의노구에도불구하고향병을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향하 던중 조령(추풍령)에서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비 분통곡하고광려산하로돌아와두문불출하고나라와백성을걱 정하다 1641년 73세(歲)의ㅡ일기로 졸(卒)하였다.무숙공은 우 리 역사에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충절(忠節)로 일관(一貫)한 용장(勇壯)”으로기록되어전해지고있다. 1871년 22세손 만성공(휘 치복)은 무숙공 행적을 조정에 상 소하여 시호 무숙(武肅)을 내리고 국불천위(부조묘)가 내려지 로 1880년 상황대보단에 배향되었다. 또한 만성공은 무숙공의 유집 「광서실기(匡西實記)」를 편찬하였으며, 1940년 족보편찬 시에 23세손 휘 연암은 여러 선조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록을 편 찬하였다. 1974년 25세손 한홍은 선조유적보존회를 설립하여 무숙공 선 조의 묘비,상석,재각을 건립하여 오늘날 후손들의 숭조(崇祖) 정신의토대를마련하였다.1979년 무숙공의 유품 231점이 경상 남도 유형문화재 103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물관을 건립하여 보 관해 오전중 2005년 유품과 문중의 고문서 1,248점을 국립진주 박물관에 기증하여, 2008년 고문서의 도록(都錄) ‘임진왜란 의 병장 박진영과 그 후손들’을 편찬하였다. 2014년 무숙공박진영 장군기념사업회주관으로무숙공의행적을재조명하는학술대 회를 개최하여 연구 논집 ‘무숙공 박진영 그 액국의 삶을 조명 하다.’를 출판하여 후손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 며,영동정공파를대표하는인물로자리매김하였다. 이상과 같이 영동정공파의 문중 내력을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행적을 알 수 있으며,구한말 만성공은 문중의 역사와 족보를 체계적으 로 정립하여 후손들에게 선조님들의 훌륭한 행적을 후손들에 물려주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불구하고선조님들은문중의고귀한역사를보존하고 계승하는데심혈을기우려왔음을알수있다. (자료제공무숙공11세손박권곤)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약사(略史) 청금재(廳琴齋)영동정공파대표재실이다. 이조 중종조에 유학자이면서 기묘명현의 한분이신 삼가선생 은 청년기에는 효를 위하여 사마시에 등과하였고 폭군 연산조 의 단상법이 엄히 시행될 무렵에는 모친상을 당함으로서 삼년 간여묘(廬墓)에서복상(服喪)하였다. 때문에 중종개옥후(中宗改玉後) 생전에 정려(旌閭)가 내렸 고 삼강행실도에 올랐다. 원래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으나 워낙 학문과덕망이높았던까닭으로현량과에천거되었고중종과의 대화에서 요순(堯舜)의 정치를 설파한 초성론(草性論)은 너무 나도 유명하다. 용궁현감으로 재직 시 인(仁)과 덕(德)으로서 행하고청렴결백한관리로서당대의사표가되었다. 선생은 성종 6년(147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 가 지극하였으며 학문도 일취월장하여 장성함에 따라 지조(志 操) 또한 고결(高潔)하여 세로(世路)에 뜻이 없고 오직 산수간 (山水間)에풍월(風月)을벗하여락(樂)을삼았다. 하루는 과거에 급제한 향인(鄕人)이 방문하니, 어머니는 이 를 만나보고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선생이 생각하기를 「무릇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가는 효도(孝道)인데내어찌혼자서이와같은일을하지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결의(決意)하여 과거에 나가 연산주(燕山主)10년 (1504)에 사마시(司馬試)에 제4인으로 구중(俱中)하고, 그 후 엔 다 시 대 과 에 응 하 지 않 았 다 . 연산군이 단상법(短喪法)을 제정하여 이 를 어기는 자(者)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한 령(令)을 내렸다.그러나 선생은 이때 모 친상을 당한지라 우심(憂心) 끝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차 라리 부월(斧鉞-도끼) 아래 죽을지언정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하고 여묘(廬墓)하며 3년상을 받들었다.중종 임 금이 등극하여 바른 정치가 돌아오니 나라에서 그 효성을 가상 히여겨정려를내렸다. 효열부열전 삼가헌박수량선생 삼가헌박수량선생효자각(左),쌍한정(강원도강릉시사천면미노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