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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0월31일 월요일 4 (제118호) 관향조 종친회 ‘구독료납부’숭조·애종·육영실천입 니다. 한빛신문은지난2007년 1월 선조님 현창사업을통해500만 성손의 자부심과자긍심을높이기위해전국성손 들의성원속에창간되었습니다. 창간이후많은어려움속에서도종중문화창달에큰역할을하였습니다만치솟은물가와많은부대비용으로 인해힘겨움을느끼면서도성손여러분께서납부해주신구독료는큰힘이되고있습니다. 종중신문의건전한운영은성손여러분께서납부하여주신구독료가밑거름이되고있습니다. 그러나매번독자여러분의구독료납부서인지로용지를계속하여동봉하다보니용지대금과수수료등추가 비용이소요되면서만만치않은경비가또발생합니다. 성손여러분! 조금번거우시더라도구독료납부방법을계좌이체로하여주시고전화를주시면고맙겠습니다.(부득이할경 우동봉한지로를이용납부하셔도됩니다.) 종중신문으로그역할을다할수있도록구독료를납부하여주시기를간곡히부탁드립니다. ▶구독료납부계좌-농협453013-55-000691예금주한빛신문 ▶구독료년3만원 ※구독료를연체하는년도가있으면계속하여지로가나가게됩니다.지로가계속동봉될경우문의하여미납된구독료를납부 하여주시면고맙겠습니다. 문의053-588-7300한빛신문 여수시는 대한민국의 남해안 중앙지점 에 입지하여 가까이는 동쪽의 경남 남해 군과 서쪽의 고흥반도, 그리고 북쪽의 순 천시와 접하고 있으며, 바다를 건너 서남 쪽으로는 제주도와 동남쪽으로는 일본과 마주하고, 남해안 중심관문을 담당하는 국제해운도시, 천혜의 해양관광 자원을 보유한관광휴양도시로도유명하다. 특히 국가경제의 토대인 여수산단, 율 촌산단이 입지한 임해공업도시로 예로부 터 농경과 어로가 발달한 양향이었으며,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 충무공과 그를 따 르던 선열들의 얼이 듬뿍 담겨진 호국충 절의고장이다. 전한공파 여수 옥적 문중의 여수 입향 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경으로 추 측된다. 입향조인 송정공(松亭公)의 휘 는 진현(振賢) 字는 진남(振南) 호(號) 는 송정((松亭)이다. 1555년 (명종10) 고 려조 사헌부규정을 지낸 휘 현(鉉)의 12 세손으로 태어나 훈련원첨정(訓練院僉 正)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1592년 경 기도 고양에서 스스로 격전지인 여수에 내려와 임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바 있 어 입향 계기가 된 듯하다.송정공이 처음 입향 한 곳은 여수시 화양면 송현마을이 다. 송현 마을의 입향은 임진왜란에 대공 을 세운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왜놈들이 무서워하므로 그의 이름 송 (松)자를찾았다는후문도있다. 당시 왜놈들은 송(松) 자(字) 이름이 있는 곳은 침범하지 못해 왜놈들과 맞서 는 장수로서 가족을 피신시키는 장소를 물색하면서 송현(松峴) 마을을 찾았고, 송현 마을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의 거 처(居處)가 바로 건너에 있었기 때문이 기도 하다.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옥적마 을로이거했다. 송정공의 아버지이 휘는 인원(仁元)으 로 1552년(명종7) 4월 식년시(式年試)에 병과로 급제하니 이날의 과시에서 종제 호원(好元, 송월당공), 근원(謹元, 낙봉 공), 그리고 종질(從姪) 계현(啓賢, 관원 공) 등과 함께 4인이 동방(同榜)하니 국 초(國初) 이래 처음으로 박문(朴門) 경 사였다. 공(公)은 1562년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정4품)을 지냈으며, 1563년 (명종18)에 성균관 사예,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570년(선조3) 홍문관(弘文 館) 전한(典翰, 종3품), 종부시(宗簿寺, 조선시대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정(正, 정3품)에 이르렀으며, 규정 공후소파인전한공파의파조가된다. 송정공이 여수 입향 이후 아들 자방(自 芳, 號 竹坡)은 무과에 올라 정유재란에 이충무공 진중에 조방장[助防將, 주장 (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 수]으로 명량해전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 고 10여척의 적선을 함몰(陷沒) 수장하 고 개선(凱旋)하다가 숨어있는 적탄에 전몰하니 선무원종훈에 오르고(錄), 가 선대부이조참의에추증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도의 좌수영 과 우수영이 허물어져 국토의 대부분을 일본군이점령하였다. 그러나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던 여수 지역은 이순신을 비롯한 장군들과 송정 공 같은 백의종군한 여러 장수와 지역민 들의 승전으로 전라도 지역을 지키게 되 었다.여수 지역에서의 승리는 조선 군대 가 전열을 정비하고, 명나라 군대의 원조 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계기가되었다. 그리고 전쟁 막바지의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는 7년의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으로 송정공과 그의 아들 죽파공의 전공(戰功)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가되었다할것이다. 입향조 송정공의 증손자 의익(儀益)은 무과에 급제하여 청성 절제사(靑城 節制 使), 그의 아들 운기(雲起)는 수직(壽職) 으로 가선대부, 손자 정채(廷彩)는 흉년 으로 허덕이는 고을 주민들을 진휼(賑 恤)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증손자 진호(震浩)는 수직으로 통정대부, 현손 태국(泰國)은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에 오르고 수직으로 가선대부, 태원(泰 源)은 가선대부 동추부사, 태칠(泰七)은 가선대부에 각각 증직되었으며, 태택(泰 澤)은 호학(好學)하여 사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밖에도 많은 후손들이 지역사회에서 모범을보이고,또는효자로,또는학문으 로 , 입 향 조 이 후 1 7 대 에 이 르 는 동 안 3 0 0 여호로 번성하여 각기 이름을 떨쳐 가문 을 크 게 빛 내 고 있 다 . 옥적문중에서는 2009년 박남운(朴南 云) 초대회장의 주선 으로 370기를 수용 할 수 있는 납골당 숭선당(崇先堂)을 건 립하여 화양면 일대에 산재해 있는 선조 님의 묘소를 이장 봉안하여 장례문화를 개선하고 후손들의 편의를 도모 해 매년 숭선당을 찾은 후손들은 선조님의 음덕 에 항상 고마워하며 추원보본의 정성을 다한다. 특히 지난해 화양면 일대의 종중 문답 (門畓) 일부를 매각하여 현 여수시청 앞 대지 80평을 매입하여 3층 건물(송정빌 딩)을 신축하여 임대함으로서 안정적인 수입을 통해 숭조사업과 친목도모를 이 루고 향후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장학금 을 지급할 예정으로 옥적문의 미래 전망 을밝게하고있다. 박진석 옥적문중 회장(현 경명왕릉 참 봉 )은 보 다 쉽 게 볼 수 있 는 가 승 보 를 지 난해 발간하고, 모든 종원들이 합심하여 숭조사상을 더욱 함양하고 애종애족의 정성으로 화목하고 도리를 다하며 발전 하여 모법되기를 기대한다며 종원들을 독려하고있다. 뱚집성촌 탐방 밀양박씨규정공후(后)전한공파여수옥적(玉笛) 문중 숭선당-전남여수시화양면옥적리산169 자동습도조절과 주변조경을통해쾌적한 환경으로 공원화하고있다. 박진석종중회장이 숭선당을안내하고있다. 송정빌딩(여수시도원로265-1)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4호로 지정되었 던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이번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86호로 승격되었다. 경북 영덕군 도곡마을(가마골) 뒤편 야 산을 뒤로하고 앞의 뜰을 내려다보며 남 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종택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박의장(1555~1615)의 아 들 박선(1596~1669)이 형인 박유(1576~1 618)를 위해 1644년 건립하였다. 건물은 대문채,본채,내삼문,사당으로 구성되며 ▲ 안마당의 확장과 사랑채의 돌출,사당 공간의높은독립성등 17세기 이 후 부 터 나 타 나 는 배 치 유 형 ▲ 지 역 의 토착성을 잘 반영한 안채와 사랑채의 공 간구성 등에서 17세기 사대부 주거건축 의 정체성과 지역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 다. 그 리 고 안 채 창 문 에 남 아 있 는 중 간 설 주(中間舌柱) 흔적이나 사랑 대청의 파 련대공(波蓮臺工) 등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엿볼수있다. * 중간설주(中間舌柱): 창문의 중앙을 가로질러수직으로덧댄기둥모양의부재 * 파련대공(波蓮臺工): 마룻보 위에 놓 여마룻대를 받치고 있는 부재인 대공(臺 工)을 덩굴나무가 서리어 나가는 모양으 로 새 긴 것 또한, 이 종택에는 집안과 관계된 문헌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고 민속적 제례행 위가 지속적으로 행 해지고 있으며, 문중 의 대소사를 이곳에 서 논의하고 친족 간 결속을 다지는 등 중 요한 공간으로 활용 되고있다. 무의공 박의장 장군 은 무과를 통해 출사 해 지방관을 두루 역 임하면서 치적을 쌓 았으며, 임란이 발발 하기 직전 경주 판관으로 부임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죽지세로 몰 려오는 왜군의 예봉(銳鋒)을 피해 경주 의 속현인 죽장현에서 군병의 조련과 무 기를 제조하며 전력을 가다듬었다. 곧이 어 1592년 7월과 9월에는 영천·경주 일대 의 의병과 박의장을 중심으로 한 관군의 연합을 통해 영천과 경주성을 수복함으 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확립하는데 기여 했다. 전쟁 중 박의장은 경상좌도를 중심 으로 수 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 로 이끈 결과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박의장은 무장으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7년동안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면서 전란 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해 목민관으 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전란 이 종결되자 조정에서는 박의장을 선무 원종공신 1등에 녹훈 했으며 사후에는 시 호와 불천지위를 내려 그의 공적을 영원 히기억하고자하였다. 영덕무안박씨무의공파종택국가지정문화재제2 86호지정 국가지정문화제 지정수여 14대 종부 김화자(74 세) 충절과 예절의 고 장인 충북 영동에서 제49회 난계국악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제4 회 전국한시백일장’ 이 지난16일 ‘추모학 촌박이룡장군’을 시 제로진행되었다. 이 번 백 일 장 에 는 전국에서 300여명의 한시동호인과 한학자 들이 참석 열띤 경쟁 속에 개최된 가운데 충주박씨 참의공 및 판서공의 팔석, 희영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대거 참석하고 우천 강릉공파 회장은 행사 처음부터 끝 까지 열정적으로 행사지원을 아끼지 않 아이날행사가크게빛났다. 오전 10시부터 난계국악당 옆 청소년 수련관에서 개최된 이날 백일장은 오후 4 시 장원(1명, 부상 70만원), 차상(1명, 부 상 50만원), 차하(2명, 부상 각30만원), 참방(20명, 각 15만원), 가작(30명, 각 10 만원)으로 나누어 시상을 하였으며,장원 에는 부산 북구에서 참가한 이종영 씨가 차지했다. 학촌 박이룡(朴以龍, 1533~1595) 장군 의 본관은 충주이다. 선생의 초명은 응렬 (應烈) 자는 시윤(施允). 호는 학촌(鶴 村)으로 (헌)충북 영동군 매곡면 임산리 세심정에서 창의한 고(故)로 군호(軍號) 를황의장(黃義將)이라하였다. 어릴 때에는 재종조(再從祖)인 사암 (思菴) 순(淳)에게 수학하였고 장성하여 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사사하 였다. 1561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처 1 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 文院正字)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등의 관직을 엮 임 하였다. 1591년에 해서순찰사(海西巡 察使)에 임명되어 재임 중에 군비(軍備) 의 유고(有故)로 1592년 3월에 원주(原 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왜변(倭變)을 당하게 되었다. 박이룡은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배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 사(武士)들을 모아서 전지(戰地)를 향하 여남쪽으로내려왔다. 전쟁에서 교전한 회수는 무려 2백여 회 에 이른다.전쟁을 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서 관군과 의병들 사이에는 때로는 서로 질시(嫉視)하거나 모함하는 일들이 있어 서 간혹 산란(散亂)하고 윤리(倫理)에 어 긋나는일들이있었으나호서출신의병장 인박이룡만은관군이나의병들에게동일 하게 화합하고 협심(協心)함으로써 공사 간에모든일들이완만하게이루었다. 1593년 10월에는 능성현령(陵城縣令) 에 제수(除授)되었다. 의병들을 모집하 여 훈련을 시키고 성벽(城壁)을 수축하 고 빈민을 구제하고 동통(疼痛)을 참아 가면서 적과 싸워서 여러 가지 기공(奇 功)을 세웠다.군정(軍政)이 혁신되고 호 남일경(湖南一境)에는 안정을 되찾게 되 었다. 재임 2년에 선정업적(善政業績)이 청백(淸白)으로 포계(되었고 1595년 1월 에는 군자감정군(軍資監正)에 제수(除 授)되었다. 능성(陵城)에서 재임중에 지 난달 부상고개(扶桑峴)전투에서 화살을 맞은 시독(矢毒)이 재발되어 1595년 4월 30일 임지 관아(官 衙)에서 향년 63세에 순직하였다.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러 임란공신에 대한 포증은전(포贈恩典)이 있어 1812년 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 었고 영동군 매곡면 내동(內洞)에 있는 세덕사(世德祠)에향사(享祠)하였다. ◆ 장 원 작 (作 ) 追慕鶴村朴以龍義將軍 (추모학촌박이 용의장군) 昔歲倭侵國步危 (석세왜침국보위)옛 날에왜놈이침략해국보가위태로울때 出 師 朴 掛 민旗 (출사박열괘모기)출 사한박이용장군장군의깃발걸었네 生前待命拯民日 (생전대명증민일) 생 전에 목숨을 가다림은 백성을 구제한 날 이요 死後慰靈殲賊時 (사후위령섬적시) 죽 은 후 에 혼 령 을 위 로 함 은 적 을 섬 멸 할 때 로다 壯志也同松竹秀 (장지야동송죽수)장 한뜻은송죽빼어난것과같고 芳聲惟許鬼神知 (방성유허귀신지)방 성은오직귀신도알을허락했네 湖西倡義登靑史 (호서창의등청사)호 서지방에서 창의함이 청사에 등제 되였 는데 赫赫豊功勒古碑 (혁혁풍공륵고비)혁 혁한풍공은옛비에새겨졌네 황의사박이룡장군추모한시백일장성료 임진왜란에창의하여2백여회에걸친전투에서공을세우고부상고개(扶桑峴)전투에 서화살을맞은시독(矢毒)이재발되어순직(殉職) 박이 룡 장군 영정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