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6년10월31일 월요일 12 (제118호) 기획 진주성은남강의깎아지른듯한낭떠러지에축조한성으로임진왜란당시김시민(金時敏)장군이왜군을대파 하여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중의하나인진주 성대첩이벌어진곳이며,1593년6월왜군의재침시에는군·관민6만이최후까지항쟁,장렬한최후를마친곳 으로당시싸움에참여했던충의열사들의위패 를봉안한곳이창열사이다.창렬사는1607년(선조40)에건립되어수차의중수가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거치 면서심히퇴락하게되었다.따라서1962년11 월15일퇴락한창렬사를중수하여지금에이른다.충의열사40위(位)를배향하였으며,이중 호조좌랑박안도, 수문장박세항,병조참의박승남선조의위패가 봉안되어있다.이들이진주성을지키려고세운공적은역사에길이빛나고있어이번호에는진주성과창열사, 봉안된세분선조님의행적을뒤따라가본다.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남성동 일원 에있다.진주시도심을가로질러흐르는남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으로는 남해고속국도와 통 영~진주간 고속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인근지역에 서의 지리적 접근도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내성의 전체 넓이는 200㎡이며, 둘레는 약 600m이다. 외성 의 둘레는 약 4㎞이다. 진주성내에는 촉석루, 의기 사,쌍충사적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 비가 나란히 서 있는 정춘관, 북장대, 영남포정사 문루, 창렬사, 호국사 등의 유적들이 있다. 2002년 5월 3일에는 진주성의 주 관문이었던 공북문이 복 원되었다. 공북문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토한 화 강암석으로 외벽을 쌓고 1층 출입문은 20평으로,2 층 1 4 평 은 옛 전 시 때 지 휘 소 로 활 용 하 던 것 으 로 복 원되었다. 진주성의 건립경위는 진주가 한반도의 동남단인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면서 삼국시대 이래 서부경싱남도의중심지로서의역할을수행하였지 만 진주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 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진주가 원래 백제 의 거열성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 미 진주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그리고 1379년(우왕 5)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강주진장배극렴이진주목사김중광에 게 공문을 보내어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촉석성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다른 기 록에 의하면, 1607년에 김태허(金太虛)가 포루(砲 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는 기록에 기초하여 지금의 진주성이 대략 이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진주성은 남 강에 면한 단애상에 축조한 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삼대 첩(壬亂三大捷)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 시에는 군·관민 6 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으로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백제 때는거열성(居列城)이었다고한다. 진주성 창렬사는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 한 후 1607년(선조 40)에 건립되어 수차의 중수가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 화곡 정사호(鄭賜湖)가 진 주에 체류하면서 계문을 통해 조정에 장계를 올린 데서살펴볼수있다.정사호는당시영남지방을순 시하다병을얻어진주에머물면서2차진주성전투 에서 성이 함락된 6월 29일이었다. 여기에 백여량 은 경상도 도사(1602~1603)로서 전란의 참상을 점 검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진양성의 참혹한 성터 를 목도하고 한없이 오열한 뒤 정충단을 세워 순국 의사의충혼을향사토록했다. 진주성에는 창렬사와는 별도로 김시민 장군의 충절을기리는‘충민사(忠愍祠)’도 건립되었다. 이 사우는 창렬사보다 45년이 늦은 효종 임진년 (1652년)에 창건되었고 현종 정미년(1667)에 사액 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에 따라 충민사가 훼철됨으로서 창렬사로 합사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1772년 창렬사에 봉안된 신 위와 증직 현황은 △정사(正祠)에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사천현감 장윤 △서사(西祠)에 복수의병장 고종후, 적개의병장 이잠, 김해부사 이종인, 우병영우후 성영달, 첨정 윤사복, 학생 이인민, 의병장 손승선, 주부 정유경, 수문장 김태백, 학생 박안도 △동사(東祠)에 창의 사종사관 양산숙, 참의 김상건, 거제현령 김준민, 분의의병장 강희열,진해현령 조경형, 진주판관 최 기필,의병장 유함,생원 이욱,의병장 강희복,수분 장 장윤현, 판관 박승남, 학생 하계선, 학생 최언량 등 28위였다. 1868년 충민사 훼철로 김시민 위패를 창렬사에 합사하면서 정사 제1위로 봉안함으로서 자연히 김 천일 이하는 순서가 한 칸씩 밀려났다.또 서사 제1 위에 있던 고종후를 정사로 이동했고, 김새 박세 항, 김덕련, 송제, 송건도, 주대청 등 6위는 1847년 까지도 봉안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접어들어 서 사와 동사에 각각 봉안하였다. 창렬사의 위패는 정 사 7位, 서사 16位, 동사 17位 등 총 40位(제장군졸 지위포함)로늘어났다. 충민사가 건립되고 30여년 뒤 경상도 관찰사 서 문중(徐文重)은 이보다 앞서 진주를 안찰하다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장수들의 공훈을 길이 현창하 기 위해 정충단비를 세우리고 하고 우병사 이기하 (李 基 夏 )와 통 제 사 김 세 익 의 동 의 를 얻 어 2 년 뒤 이 조판서 겸 대제학 이민서(李敏敍)의 비문을 대사 런 겸 동지성군관사 신익상의 글씨로 각각 새겨 16 86년 8월 촉석루 인근에 촉성정충단비를 건립하였 다. 박정희 前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시 절 창렬사를 방문 진주성전투에서 숨진 수많은 무 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비석 ‘제장군졸지위 (諸將軍卒之位)’를세우기도하였다. ▲증호조좌랑박안도(贈戶曹佐郞朴安道) 박안도(朴安道)의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진 경(眞卿) 혹은 유경(由卿)으로 태안부원군(휘 원 의)의 13세손으로 증조부(휘 자유)는 성균생원으 로 승의랑, 김해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조부(휘 인) 의 호는 호은(湖隱)으로 타고난 효자이다. 당시 연 산군은 스스로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단상을 시행 하는 등 삼년상을 금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법으로 명문화하였다. 그러나 호은공은 아버지 상 을 당해 여묘(廬墓) 삼년상제를 행하였으니 중종 대왕때사실이알려져정려가내려졌다.아버지휘 세적(世勣)은 참봉으로 진주 내동(奈洞)에 살았 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官 民)이 흩어짐을 보고, 같은 고향의 뜻있는 선비들 과함께의병을일으켰다.그러자많은사람들이이 에 합세하여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사 양하고 자신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무를 정 돈하며,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군의 사기를 높였다. 1593년(선조 26) 왜적들이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면서 많은 병력을 진주성으로 집결하여 제2 차 진주성전투를 벌이자, 박안도는 경상우도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 여러 장 군들과 함께 성을 수비하며 방어대책을 세웠다. 그 러나 중과부적으로 10일간의 대격전 끝에 진주성 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경회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후에 선무공신 (宣武功臣)에 녹훈되고 호조좌랑에증직되었으며, 최경회, 황진,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창렬사(彰烈祠)에 제향 되 었다. ▲증병조참의박승남(贈兵曹參議朴承男) 공(公)의 휘(諱)는 승남(承男)이요 자(字)는 군 직(君直)이니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충헌공 휘 척(陟)의 십사세(十四世) 손(孫)이요 정용장군 (精勇將軍) 성진(成進)의 13세손이요 판전판시사 (判典板寺事) 밀천군(密川君) 원(原)의 12세손이 며 보문각 대제학( 粕文閣大提學) 밀양군(密陽君) 윤 문(允文)의 11세손이다. 이어 문과(文科)에 오 른삼양(三陽,정언공)의10세손이며,가산부사(嘉 山府使)명철(命哲)의 아드님이다. 공(公)이 밀양 남면 화산촌(密陽南面花山村)에 서 태어났으니 사람됨이 웅건(雄建)하고 성품이 또한 강명(剛明:강직하고 명랑함)하였으며 널리 경적(經籍)을 섭렵(涉獵)하고 겸하여 병략(兵略: 병서)을 좋아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위인(偉人)이 라고일컬었다. 선묘(宣廟:선조) 2년 무진(戊辰)에 비로소 벼슬 에 올라 행 경릉참봉(行 慶陵參奉)이었고 계유년 (癸酉年)에는 행 대구판관(行 大邱判官)이였더니 벼슬을 맡은 뒤로 마음가짐을 공평하고 부드럽게 하여 봉공(奉公)에 정성을 다하였다. 백성에게 넉 넉하게 은혜를베푸니관(官)이 된지 3년에백성들 이 그 덕(德)을 칭송하였다. 도이(島夷:왜적)의 변 (變)을 당해서는 공(公)이 그 아우 승립(承立)과 더불어 밀양(密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어 진양 (晋陽)으로 달려가서 본주(本州)의 판관(判官)김 공 시민(金公時敏)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적을 공 격하여성을보전하였다. 계사년(癸巳年) 6월에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김 공 천일(金公千鎰)과 최공 경회(崔公慶會)와 여러 의병장과 강희열(姜希悅)등 십 여인(十餘人)과 더 불어 성의 동쪽 보루(堡壘)에서 싸우다가 적이 백 겹으로 포위하고 성의 삼판(三版)이 잠기고 힘이 다되고 화살이 다 되자 손을 잡고 통곡(痛哭)하면 서 북향(北向)하여 사배(四拜)하고 물로 달려가서 순국하였다. 공(公)의 묘소는 전해지지 못하여 경 남고성군하이면 월항리에선조5위(位)와함께 단 소(壇所)를 마련하고 후손들은 향화를 받들며 선 조의높은충절을기리고있다.조정에서충성을드 러내어 액(額)을 내리고 진주의 충렬원(忠烈院)에 함께 모셨으니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 曹參議)를 내렸다. 그리고 또 선무원종 이등공신 (宣武原從 二等功臣)에 기록 되었다. 한편 공(公) 의후손들은부인경주이씨가슬하의아들5형제를 데리고 경남 밀양에서 고성군 하이면 월항리로 이 주해 세거를 이루고 있으며 증직 교지가 전해지고 있다. ▲수문장박세항(守門將朴世項) 공(公)의 휘(諱)는 세항(世項)이요 자(字)는 원 량(元亮)이며 계출(繼出)은 밀성(密城)이니 삼한 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욱(郁)의 후예 (後裔)다. 밀직군 언인(密直君 彦仁, 복야공파조) 의 11세손이요 사문진사(四門進士) 필문(必文)의 증손(曾孫)이며 강호(江湖)의 일사(逸士)성봉(成 奉)의손자요학생(學生)인손(仁孫)의아들이다. 충과 효 그리고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본디 집안 이 대대로 지켜오는 것이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 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으니 보는 사람 들은큰인물이될것이라고여겼다.장성하자공은 기절(氣節)을 숭하하고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고 궁마(弓馬)를 익혀 힘이 아주 세었고,무예도보통의수준보다훨씬뛰어났다.마 침내 공은 무예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수문장 에이르렀다. 공은 성품이 본래 활달하여 낮은 벼슬아치들 밑 에서 오랫동안 있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벼 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동지들과 차와 술을 마시며 담소하였다. 그러다 술이 취하면 늘무릎을치고비분강개해하며말하기를,“대장부 가이세상에태어나위에밝으신임금이계시고아 래에 어진 신하가 있어 변방에는 적이 쳐들어온다 는 소식이 없고 훌륭한 정치가 흡족히 이루어진다 면 이내 한 몸 태평성대의 일민(逸民)이 되어 밭을 갈아밥을먹고우물을파서물을마시는것이본디 나 의 마 음 이 다 . 하 지 만 한 번 나 라 가 잘 다스려졌다 가 다시 어지러워져 온 나라가 전쟁판이 되고 다친 사람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며 군부(君父)는 모욕 을 당하고 사직(社稷)이 위태로워지면 살고 있는 동리에서 몸을 떨쳐 한 자 칼을 쥐고 적진(敵陣)으 로 나아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 이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와 그 다음해에 왜적이 대 거 침입하여 팔도가 도륙을 당했는데 진주 고을은 실로 삼남(三南, 경상·충정·전라도)의 목구멍이 되는 곳이라 적들은 반드시 함락시킬 계책을 세웠 다.하지만진주는우리나라를반드시지켜야 할땅 이었다. 이런 고로 계사년(癸巳) 6월에 적장 가등청정 (加藤淸正)이 모든 왜병을 합하여 부산(釜山)으로 부터진양(晉陽,진주)으로향하였던것이다. 이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과 경상우병사(慶尙右 兵使)최경회(崔慶會)가 와서 지키고 있었고,공은 백명이 채 차지 못한 의려(義旅:의로운 군대)를 거 느리고가서성을지키고적을공격하며한결같이 함께 서로 구제 하였다. 이달 28일에 황공(黃公)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그 다음날에 성이 함락되니 김 , 최 두 분 은 모 두 남 강 (南 江 ) 에 몸 을 던 지 고 공 도 또 달려가서 함께 순국하였다. 난(亂)이 평정되 니 선무원훈(宣武原勳)에 기록되고 뒤에 양무(揚 武)3등의 훈(勳)에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은 『진양 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 이 올랐다. 공에게 내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경상 남도 문화재자료(제282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의 묘소는 2012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551호)로 지정관리되고있다.또한공에대한추증을청원하 는문서가전해지고있어인용해본다. 【경상감사에올리는상서문】 진주에거주하는유학유지현,윤필대,김기철등 은 목욕제계후 백배 하옵고,감사 각하께 타원서를 올리나이다. 엎드려 살피옵건데 유공자를 사당에 모시고 이들에게 관직을 추증하는 일은 나라의 큰 의식이며, 충절을 정표하고 포상하는 일은 조정명 령의 중요한 법도라고 알고 있아옵니다. 별과 달의 밝음과 솔과 대나무의 사철 늠름함은 삼척동자와 목동초우도 능히 알고 있는 사실일진데,혹 정당한 건의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의 여하에 따라 폐기 묵살된일은없음인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박세항은 일당백의 의병으 로서 당시 김천일 황진 최경회 김시민 고종후 등과 는 의기투합 간담항조 하는 사이였으며,이들과 함 께 적의대군을 맞아 뛰어난 기지와 초인의 용맹으 로 성을 지키고 적을 침에 있어서 유감없는 협동전 을 펴 악전고투하다가 드디어 성이 함락하매 구차 한 도생을 마다하고 김천일 등과 더불어 혼연 남강 에몸을던져함께장렬한최후를마치었나이다.그 의병을 일으켜 대절에 순사한 만고에 찬연한 공적 은이미배향을받은저들공신들과견주어무슨손 색이있겠아옵니까? 당초 국난에 순절한 공훈자의 사당을 지을 때 어 떤 이게는 사당에 같이 배향하는 은택을 주기도 하 였고,어떤 이게는 공적에 상응하는 관직을 추증하 기도 하였거늘 유독 박세항만은 저들 배향되고 추 증된 분들과 명운을 같이 한 공적이 현저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끝내 국왕의 우악한 은총을 입지 못한 채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 아무런 보상 없이 무덤사이를 헤매며 흐느껴 울고 있나이다. 이는 오 로지 자손들의 불민과 유림을 잃은 탓일 수밖에는 없아옵니다. 어비(임금이 열람하는 문서에 붙이는 말)에 이르기를 『권세 있는 자는 공이 작아도 포상 을 받고, 권세 없는 자는 공이 커도 덮어지는 수가 많으니 각별히 유념 할지어다.』라고 하셨으니 이 어찌민간세정을통찰하심이아니겠사옵니까? 전술한 박공의 공적은 소생들이 새삼스럽게 들 추어낸 말이 아니라 충렬록에 명명백백하게 기록 되어있는사실이옵니다.이에소생등은한목소리 로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고 땅에 엎드려 정성을 모 아정의를흠모하오니이사실을주상께계문(관찰 사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하시어 억울하게 파묻혀 빛을 발하지 못한 박공의 공훈을 찬양할 수 있도록 조처있으시기천만바라옵니다. /참고문헌충렬록,족보등 /사진·정리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 ail.net) 진주성 창렬사에 배향된 임란의병장 호조좌랑 박안도, 수문장박세항, 병조참의박 승남 선조 유지를찾아븣 진주성(晋州城) 진주성전경-(○)은창렬사. 창렬사(彰烈祠) 창렬사전경. 故박정희 前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 방문하여 나라를위해몸바친제장졸의영혼을달래기위해세운제장 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와기념비. 고병훈진주성호국정신선양회장(右)박순용총무이사가창렬 사안내를하고잠시포즈를취하고있다. 박승남교지 박세항공(公)묘소(上)아래는부인묘소-경남문화재자료제551호. 배향선조 수문장박세항록권과증직을청원하는상서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