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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8월31일 수요일 7 (제116호) 관향조 종친회 사직공의 6세 성재처사(휘 붕)의 두 아들 수(守) 와 인수(仁壽)는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크고 작은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장남 수(守)는 선무 원종공신2등,차남인수(仁壽)는동래성전투에서 순직하여 그 공적이 부산 동래 충열사 경내에 비석 에새겨져전해지고안락서원에배향되었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기(耆)의 아들 4형제중 장 남 대 생 (大 生 ) 의 후 손 들 은 보 사 (譜 事 )에 많 이 누 보되어그행적을찾을수없고,차남현생(賢生)은 손자 근(根)이 장사랑(將仕郞)으로 아들 4형제를 두니 장남 세영(세영)은 충익위(忠翊衛)로 후손들 은당두문중이라 하고,차남 세화(世華)충찬위(忠 贊衛)로서 임당문중, 삼남 세분(世芬)은 참봉( 핫 奉)으로 대구 흥덕문중,사남 세건(世健)은 충찬위 (忠贊衛)로 사동문중으로 후손들은 각기 세계를 이루고있다. 이조참판공(휘 기)의 삼남 인생(仁生)의 후손들 은 의성, 청송, 군위 등에 산재하며 인생공문중이 라하고 참판공 사남 효생은 사직공파로 파보를 수 보하고있다.( ※ 기 타 집성 촌 은 세 계 도 를 참 조 ) ○ 군기시정(軍器寺正) 박신길(1598~1636) 靖 國君8代孫忠州門中 증조부는 박윤정(朴允貞)이고, 조부는 박응규 (朴應奎)이며,아버지는박대현(朴大顯)이다. 1620년(光海君 12) 武科 丙科 제1,724인으로 급 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丙子胡亂이 일 어나자 南漢山城에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처음 남한 산성에 들어갔을 때부터 죽을 각오로 싸우기로 작 심하고 무명지를 끊어 하인에게 주면서 고향 집에 돌아가 훗날 配位와 합장하라고 명하였다. 公이 전 사한 뒤에 하인은 명한 대로 配位와 合葬한 것으로 전해진다. 1727년(영조 3)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 청리에있다. ○도은공(棹隱公)박순생[朴順生,1601~1680) 靖國君7代孫密陽 仕洞門中 字는 광언(光彦)이며號는 도은(棹隱)이다. 37세였던 인조(仁祖) 15년(1637)에 武科 정축 (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4120위(4221/550 6)로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위부호군(折衝將軍行 龍衛副護軍)에 올랐으며 승자(陞資)하여 가선대 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이르 렀다. ○통정대부(通政大夫)박동립(朴東立,1608~?) 靖國君 9代孫 平南 殷山門中--移居로 永川 公德 門中 父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한 박광란 (朴光蘭)이다. 37세였던 인조(仁祖) 22년(1644)에 武科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165위(19 1/200)로 급제하였다. 후일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행용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에 올랐다. ○地仙堂박진무(朴震懋,1656~1741) 靖國君10代孫,密陽 仕洞門中 밀양지역의 朝鮮 後期를 대표하는 유명한 학자 였다.유고(遺稿)인 지선당일고[地仙堂逸稿]에 의 하면븣「시제생(示諸生)」은 문생들을 훈계한 것으 로, 사람이 학문을 하지 않으면 도리를 알 수 없고 인륜을 모르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하면 서학문에정진할것을권하였다.또한시의독주역 하편(讀周易下篇)」에서는 이(理)와 음양의 오묘 함과천풍구(天風 넌)·지수사(地水師)·괘명(卦名) 등을 열거하면서 『주역』의 심오한 이치는 쉽게 말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명도선생(明道先生)」 은 정호(程顥)의 훌륭한 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라 고기록되어있다. 이 지선당일고에는 시 42수, 부록으로 행장 1편, 만장 30수, 제문 7편, 묘지 1편, 묘갈명 1편, 투증시 첩(投贈詩帖) 12편, 지(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 으며, 끝에 합간된 『춘헌실기(春軒實記)』에 손자 윤중(允中)의행장1편이있으며 1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20년 族後孫 창번공 교리해철(海徹)公이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노상직(盧相稷)·김유(金金柔)의 서문이, 권말에 조세환(曺世煥)·박춘욱(朴春郁)·해철(海 徹)등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친척들을 불러서 밤새도 록 즐겁게 술을 마시며 자세하게 이별을 고하고 昇 天하니 사람들이 다 이르기를 참으로 地上의 神仙 이라고전해졌다[朴氏文獻錄] ○강림재(講林齋)박후종(朴厚種,1702~1798) 靖國君11代孫,淸道林塘門中 임당 入鄕祖이시며 1787년(정조11년)丁未 대조 재(大早災)時에 경남 창원 기민(饑民) 800여명에 게 1,000餘石을 구휼(救恤)하였으며, 그밖에 세금 체납(稅金替納), 태형 면제(笞刑免除) 등의 선행 (善行)을 베풀어 지역 士林 김익삼(金益三)外 33 인이 5차에 걸쳐 상소(上疏)하여 포상케 하였다 (昌原慈善編). 이러한 여러 가지의 功으로 1790년 가선대부(嘉 善大夫)를 제수(除授) 받은 후 가의대부(嘉義大 夫)로 가자승전(加資承傳)하였으며 그 후 자헌대 부(資憲大夫)를 거쳐 1794년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正憲大夫知中樞府事)에 오르셨다. 이러한 경덕보민의(敬德保民)정신은 벼슬에 집 착하기 보다는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는 애민 정신(愛民精神)의 삶을 대표한다고 할 것이다. 公 을 모신 齋舍로는 임당리에 강림서당(講林書堂)이 있다. ○ 司憲府 持平 화음(華陰) 박동준(朴東俊, 1727 ~1791) 靖 國 君 13 代 孫 忠 州 周 德 門 中 字는 평중(平仲)이요 號는 화음(華陰)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효력부위 박성구이며, 할아버지는 박 필하(朴必夏)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박인원(朴仁 源)이며어머니는남양홍씨이다. 1773년(영조 49) 文科에 丙科 11위로 급제하였 다. 1775년 자여도(自如道) 찰방이 되어 업무를 수 행하다 역호(驛戶)권치문(權致文)을 죽여 귀양을 갔다.1784년(정조 8)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복귀 하여 1785년 1월에 정자(正字)로,3월에는 저작(著 作)으로 승진한데 이어 봉상시직장이 되었다.1785 년 12월 성균관전적, 1789년 사헌부지평, 1790년 용양위부사과와사간원정언이되었다.같은 해3월 에는다시사헌부지평이되었다. 묘소는충청북도괴산군불정면추동리에있다. 그동안폐족(廢族)으로 몰려李朝에서 온갖핍박 속에처해있던정국군파에서최초로文科에登科하 였다. 이리하여밀양출신의전예조좌랑안경점공에게 본향을 찾고자 부탁한 결과 마침내 충주문중과 당 두문중의 재회로 인해 충주 문중의 주도와 밀양 당 두 문중의 협조로 1800년 최초의 정국군파 파보인 경신보(庚申譜)가發刊되게되었다.정국군파에끼 친公의功勞가실로至大하다할것이다. ○ 숭덕전(崇德殿) 참봉(參奉) 노농당(老農堂) 박 기성(朴基聖,1749~1830) 靖國君13代孫,密陽 堂斗門中 字는 개원(開遠)이요 號 는 노농당(老農堂)이다. 숭덕전(崇德殿) 참봉(參 奉)을 역임하였으며 靖國 君派의 再起를 위해 心血 을 기우렸다. 사재를 출연 하여 중조님과 참판공(參 判公 휘 기)을 奉享하는 신남서원(莘南書院)을 창 건하고 위토답을 헌성하 였으며 정국군파 최초의 派譜인 庚申譜(1800년)를 永川 은해사(銀海寺)에서 발간하여 爲先事業과 宗 族간의 敦睦에 크신 공적 을남기셨다. ○通政大夫 당암(棠岩)박문호(朴文琥,1833-19 17) 靖國君15代孫,密陽 堂斗門中 字는 주견(周見)이요 號 는 당암(棠岩)이다. 사헌 부 감찰 및 영덕 군수를 역 임 한 후 加 資 되 어 通 政 大 夫에올랐다. 특히 영덕군수 재임시에 현재의 영덕읍을 관통하 는 五十川이 홍수 때면 범 람하여 영덕읍을 물바다 로 만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제방을 축조하고 하 수도를 정비하여 수마로 부터 구하였다. 이러한 공 적을 기려 후일 영덕군민 들이 야성초등학교 부근 오십천제방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그 功을 찬양하였다.[현재는 영덕군청내에 이건 되어 있다] 또한 萬石꾼의 토지가 밀양 일원 및 낙동강 너머 김해평야 북단인 현재의 창원시 대산면지역 까지 미쳤으며 이러한 재산을 빈민구제와 적선을 많이 하여 밀양 하서면(무안면)과 하남면 및 창원시 대 산면모산리에父子송덕비가건립되어있다. ○ 弘文館 校理 창번(滄樊) 박해철[朴海徹, 1868 ~1934) 靖國君16代孫,密陽 堂斗門中 李朝末 혜성과 같이 나타나 정국군파의 위상을 크게 선양하였다. 字는 공요(公堯)이고 號는 창번 (滄樊)이다. 父는 영덕 군수를 지낸 장암공 박문호 (朴文琥)이다. 1892년(고종 29) 약관 25세에 임진 (壬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51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겸 지제교 경연시독관을 역임한 후 을 사늑약에일진회를공박하고매국오적배를규탄한 후낙향하여위선사업에전념하였다. 무엇보다도 孝心이 지극하였다고 전한다. 親喪 을 당하여 너무나 애통하니 뜰에 핀 길경화(桔梗 花)의 자색이 돌연 흰빛으로 변하여 효감[孝感]의 소치라고칭송하였다한다. 경술합방 후 비탄에 젖어 낙향한 후 나라가 없는 백성으로서의 처지를 한탄하시면서 오직 위선 사 업에여생을바치셨다. 경주의 알영정(閼英井)비문을 지었으며 밀양 영 남루경내의밀성대군제단비를건립하였고신남서 원 경보당을 중수하였으며, 특히 1927년(丁酉)에 사재를 들여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密城朴氏 상 조(上祖)이신 密城大君[諱 彦 ]과 그의 長男이 신 진무공신 삼중대광삼한벽공도대장군[鎭撫功臣 三重大匡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과 孫子이신 요 동독포사(遼東督捕使, 諱 瀾)을 모신 제단(祭壇) 경덕단(景德壇,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357호) 및 재숙소(齋宿所)인 만운재(萬雲齋,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272호)를 건립하시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 도 외삼문(外三門), 景肖齋(경초재), 유경각( 창敬 閣),앙경문(仰景門)등이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족보인 靑邱氏譜[一名: 萬姓 譜]를 편찬하였으며 汎朴氏 총보(新羅朴氏總譜) 와 정국군파보인 庚申譜(1920년도본)를 편찬 하였 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大韓民國 族譜인 청구씨 보는 원래 尙州출신 송윤식의 증조부인 서강공이 작업을 시작하여 3대에 걸쳐 대동초보를 작성하였 는데 창번공께서 송윤식의 출간의뢰를 받아 증보 하여 만든 것으로서 전 20책으로 밀양의 첨어대에 서 발행하였고 서문은 가선대부 완산인 이명익과 풍산인 김세락이 썼고 발문은 통훈대부 한산인 이 정규와창번공께서썼다. ○崇德殿參奉 박지홍(朴志弘1873~1915) 靖國君18代孫昌原上德門中 字는 성숙(聖淑)이며, 위선 정신이 투철 하여 고 려충의백정국군신도비를建立하였다. 公의종제 인 지목(志睦, 初名 圭洪)公도 崇德殿 參奉을 역임 하였으며,일찍이신학문을받아들여알들인규(寅 圭, 一名 學圭)가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 하였고 손자 종무(鍾武, 一名 乙龍)가 서울대학교 敎授를 歷任하였다. ○制憲議員 만강공(晩岡公)박해극(朴海克,188 2~1952) 靖國君16代孫,密陽 堂斗門中 字는공익(公羽)호는만강(晩岡)이다. 창번공의 동생으로서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 과를 졸업하고 정곡현릉 참봉[鼎谷顯陵 參奉]을 역임하였으며1948년5월10일에실시된制憲國會 議員(慶南 密陽乙)에 피선되어 憲法起草委員會委 員으로서대한민국헌법제정에이바지하였다. ○憂國之士인숙(仁叔)박지원(朴志源,1893-19 66) 靖國君18代孫,密陽 堂斗門中 1893년 궁내부 주사[宮內部 主事]를 역임한 시 채[時彩]公의 長男으로 태어나 기미년(1919년) 3 월13일 밀양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도내 곳곳에서봉기한만세운동에주도적으로활동하였 다. 이후 동년 9월에 만주 길림성 유화현에서 조직 된 대한독립단 단장 李相龍[安東 출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후일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을 역임]의 밀령을 받아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군자 금 기금활동을 위해 동년12월에 청년연합회를 조 직하여 기금활동을 수행하였다. 주로 慶南北과 전 국일원의 부호친족으로부터 모금하여 전달 중에 은신처에서 친일도배의 밀고로 피포되어 모진 고 문끝에7년의옥고를부산형무소에서치러셨다. 1982년 정부는 公께서 이루신 우국충정의 숭고 한뜻을기려건국포장(建國褒章)을수여하였다. ○박종무(朴鍾武,一名朴乙龍,1925~2002)敎授 靖國君20代孫昌原上德門中 정국군파에서 배출한 한국 수학계(數學界)의 天 才이다. 祖父는 崇德殿 參奉을 지내고 昌原 靖國君 神道碑(현 용지공원)를 건립한 지홍(志弘)이며 父 는고려대학교교수를역임한학규(學圭)이다. 1925년 창원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1949년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동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경북 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동국대학교 교수, 서울대학 교 수학과 교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 대한수학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등을 지 냈다. 한국에 미적분학(微積分學)을 소개하는 데 주도 적인 역할을 한 수학자이다. 국내 처음으로 미분기 하학을소개하였고대한수학학회회장으로있으면 서 이 단체를 국제수학연맹에 가입시키는 등 수학 발전에 힘썼다.저서로는 [미분기하학],[미적분학 연습], [사영(射影)기하학] [집합론 입문], [현대 수학의 기초개념],[리만기하학], [수학대백과 사 전]등이 있으며 과거 중븡고등학교의 수학 교과서 거의 대부분을 집필하였다. 수학계에 전해지는 일 화로는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재학 중에 학생 신분 으로서울대학교공대생들에게미적분학을정식으 로 강의하였다고 한다. 학계에 기여한 공로로 1969 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1990년 모란장 등 다수의 상 을 받 았 다 . ○박일(朴一,1927~1997)국회의원 靖國君18代孫,密陽 堂斗門中 第 8·9·10·12·14대[5선] 國會議員을 지낸 密陽 이배출한한국야당의巨木이었다.. 1927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여 서울휘문고 를 졸업하고, 1949년 연세대 문과를 수료하였으며, 1983년 미국 조지타운대에서명예정치학박사학위 를 받았다. 휘문고를 졸업한 후 밀양제일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교장에 의해 고발되자 피신해서 노무자생활을 하 다가해방을맞았다. 해방 후 밀양에서 동혈건설단(同血建設團)이라 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대학재학시에는 연 극반을조직하여농촌계몽운동을전개하였다.반공 청년단밀양단부위원장을지내다가,27세때인195 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 래, 이후 4·5·6·7대 총선에 계속하여 출마하였지만 8대총선에가서야당선되어원내에진출하였다.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공천으로 밀 양에서네번째로출마하여당선되었지만이듬해10 월 유신으로 인하여 1년 3개월 만에 의원직을 잃었 다. 그러나 유신 후 실시된 1973년의 제9대 선거와 1979년 제10대 선거에서는 신민당 공천으로 창녕· 밀양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연이어 당선되었다. 한 편, 1976년에는 신민당정책심의위원회 의장을 역 임하였다. 1980년에 전두환(全斗煥)등 신군부가 집권하면 서 政治活動을 규제당해국회의원직을박탈당하였 고, 11대선거에도 출마하지 못하었다. 그러다가 19 84년에정치규제가해금되어이듬해2월제12대국 회의원선거에서는민한당공천으로당선되었다. 그러나 곧 민한당을 탈당하고 정치규제에서 해 금된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계 야권연합 세력이 결성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1984 년반독재단일투쟁기구로서결성되었던민주화추 진협의회에도가입하여부의장을역임하였다. 1987년 민주당 정무위원, 1988년 민주당 밀양지 구당위원장, 한일의원연맹 한국대표, 한·파프아뉴 기니 의원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13대총선에서는낙선하였다. 그 뒤 1991년 신민당 최고위원과 당무위원, 민주 당 당무위원 등을 거쳐, 1992에서 1996년까지 제14 대국회의원(전국구,민주당)을지냈다. 이듬해는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이 되었고, 1993 년 한·인도의원친선협회장과 민주당 상임고문을 거쳐, 1995년에는 民主黨 代表最高委員 등을 역임 하였다. ▶정국고가 ▶교동재 ▶사정재(思井齋) ▶도남재(棹南齋) ▶첨모재(瞻慕齋) ▶정장재(靖獐齋) ▶추모재(追慕齋) ▶화남재(華南齋) ▶모성재(慕醒齋) 뱚▶6면에서계속 뱚정국군파를빛낸人物(生年順) 강림서당-경북 청도군금천면임당리 박기성 영세불망비 (무안 면정곡리국도변) 박문호 영세불망비 (무안 면정곡리국도변) 만운재-경남밀양시무안면무안리854 뱚정국군파(靖國君派)주요유적 경남밀양시무안면삼태안길27-23 정국군파 대 종가(宗家)이다. 1923년 정국군의 17세손 홍문 관 교 리 휘 해철 公이 거액을 출 연하 고 문중 전 종원의 공력 (功力)과 역사(役事)로 건립되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러 퇴락하고누수가있어2014년후손들이 뜻을모아1억8천만 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평소 염원해 오던 종가 중수공사를 완 성하여옛모습을되찾았다. 경북 영천시대창면용대로 828 교동재는 만호공 휘 인헌(仁憲)의 재숙이다. 公은 정국군의 8世이고, 字는 주언(柱彦) 號는 지은(芝隱)으로 1555년에 태 어났으며, 영천 문중 입향조이다. 정략장군 수군 만호를 역 임했다. 경남밀양시부북면사랑골길96-9 사정재는 정국군의 5世 휘 세건(世建, 충찬위) 公이 밀양부 북면 대항리 정촌 마을에 이거한 유허로서 후손들의 公 의 사적을기리기위해1978년건립한 재사이다. 첨모재는 경북 청도군 풍각면 덕양리에 있는 재실로서 정국 군의 9세 휘 태명(泰明)의 재숙소이다. 공(公)의 자(字)는 대 행(大行)으로 숙종조에登科하여통정대부 오위호군을역임 하였다. 정장재는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정국군 后 충찬위공의 5세 휘 석조 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이다. 경남밀양시청도면고법리 정국군의 14세(世) 청명재(淸明齋) 박인후 公의 강학소(講學 所)로서 헌종3년(1837년) 창건되었는데 1930년에 중수 한 후화강재(華岡齋)라 천액을고쳤다가1974년재사의동편에 공의 12대조 소암 휘 효생(孝生, 司直公)의 제단을 추설(追 設)하고 재호를 추모재(追慕齋)라 하였다. 청명재공은 부북 면 퇴로리에 세거하다가 헌종2년(1836)에 아들 4형제 손자1 3인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거했는데 학행이 독실하여 향리 의 추앙 을 받았 다. 화남재는청도면고법리명방촌에있으며,이 마을입향조명 헌공 휘 상빈(尙彬)을 추모하기 위해 7世 주손 위 정표(正杓) 公의 長子 지석 외 5형제가 선친의 뜻을 이어 우모재숙하는 곳으로 1994년에창건한 재실이다. 도남재는 밀양시 무안면 판곡리에 있으며, 정국군의 8世孫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휘순생(順生, 호棹隱)을추모하 기 위해 주손 창규, 지구, 응규, 지석, 종수 등의 주관으로 건 립한 재실이다. 경남밀양시청도면고법3길48-9 모성재는 성암(醒옷) 휘 문하(文夏,1830-1877) 公을 추모 하기 위해 증손 창규(昌圭) 모부인 김해김씨가 각고의 노력 끝에 거금을 모아 1963년 건립한 재사이다. 성암공은 정국 군의 16世이며 사직공(휘 효생)의 14세이다. 공은 학업에 근 면하 고 효목 ( 孝睦) 을 도타웁게 실행하 여 ‘ 모든 사람이 취해 있을 때 나 홀로 깨어있다’하여 자호(自號)를 성암이라 하 였다. 만게정은 모성재 동편에 있으며 만취처사 휘 창규 공의 생전 에손님을맞이하고가족들의 회합과 학문을 탐구하는장소 로 그의아들종화종훈형제가1996년창건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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