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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8월31일 수요일 6 (제116호) 관향조 종친회 정국군파는 密城大君(언침)의 15世 支孫(시조 44世)으로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을재(乙 材)의 三子 휘 덕기(德基, 밀직부사 문하시중)의 7世이다. 아버지는 려조(麗祖) 판각문사 보문각 대제학 증 정승 휘 광후(版閣門事 寶文閣 大提學 贈政丞諱光厚)모(母)정경부인 안동김씨(貞敬 夫人安東金氏)의 장남으로태어난휘쭈다. 공민왕조에 등과하여 여러 지방관(尙州府使, 金海府使, 永興府使, 晉州牧使, 鷄林府尹)을 두루 역임(歷任)하면서 훌륭한 공적(功績)을 남겼다. 첫 임지(任地)였던 상주부사(尙州府使) 시(時) 에는 제2차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을 맞아 공 민왕(恭愍王)의 복주(福州 現 安東) 남행(南行) 시 안동까지의 호송(護 送) 총책임을 맡아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遂行) 하여 오늘날 까지도 전승 (傳承)되어 오는 븮안동 놋 다리밟기븯의 전설(傳說) 을 이룩하였으며, 김해부 사(金海府使)시에는 김 해 분산성(盆山城)을 수 축 (修 築 )하 고 이 후 부 산 (釜山) 동래성(東萊城), 울산(蔚山) 신학성(神鶴 城) 축성(築城)을 통해 경상도 동남부 돌출부(突 出部)에 대한 트라이앵글(Triangle)을 완성하여 잔학(殘虐)한 왜구(倭寇)들로부터 이를 방어(防 禦)하였고 두 차례의 황산강(현 낙동강) 전투(戰 鬪)에서는 수륙협동(水陸協同) 작전으로서 적군 을무찔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 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 영(崔瑩)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경상도도순 문사를 거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로 있을 때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였 다. 그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공신이되어충의백(忠義伯)에봉해졌다. 무엇보다도 1389年(昌王 2年)에 이룩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海外遠征)에 빛나는 대 마도(對馬島) 정벌은 그때까지 그렇게도 고려민 들과 이웃나라들에게 온갖 만행(蠻行)을 자행(恣 行)하던 왜구의 본거지(本據地)를 소탕(掃蕩)한 정의(正義)의 원정(遠征)으로서 그 의미가 청사 ( 靑 史 )에 길 이 빛 나 고 있 다 . 이 는 앞 서 려 원 (麗 元) 연합 총사령관으로서 일본 본토를 공격한 장 군의 외고조(外高祖) 김방경(金方慶) 장군과 장 군의 뒤를 이어 대마도를 공격한 외재종(外再從) 우의정 김사형(金士衡)과 더불어 친인척간에 이 루어진우리역사강전무후무한일로서분명히정 국군후예집안은일본과는적대적인검붉은피가 용솟음치고있다할것이다. 한편 정국군께서는 그렇게도 어렵게 정벌한 대 마도였건만 이 후 버려두고 방치한 결과 마침내 일본령이되어버려오늘날독도문제가거론될때 마다 그 지정학적(地政學的) 중요성을 생각하면 천추의 한(恨)이 됨은 정국군파 후손들만이 아닌 온대한민국국민된사람모두의한결같은마음일 것이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 등 9인과 함께 중흥공신(中 興功臣, 九功臣)으로 시대정신을 선양하려 하렸 으나 한편으로는 고려의 마지막을 장식(裝飾)한 불멸(不滅)의 두 충신(忠臣), 즉(卽) 절친하였던 문(文)의 포은 정몽주 선생과 무(武)의 대은 변안 열 장군(長孫 大生의 처조부)의 죽음은 장군에게 과연어떠한마음으로다가왔을까? 이러한 번민(煩悶)의 일환으로 일러난 고려에 대한 연민(憐憫) 때문에 이흥무(李興茂)의 의혹 사건(疑惑事件)에 연루되어 구금되어 대간(臺 諫)과 형조에서는대역죄로논의하였으나참찬문 하사직에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폄출(貶黜)되는아픔을겪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자손들에게는 영광의 꽃 이 되어 장군께서 스신 친필 대동문(大同門) 「읍 호루(揖灝樓)」현판(懸板)이 오늘날 북한 국보 제 1호의 영광으로 되돌아왔으니 이를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아니할수없다. 다시 이태조(이성계)의 부름을 받아 참찬( 핫贊 門下府事)에 복직(復職)되고 이어 1389년 친군위 도 진무(親軍衛都鎭撫), 정국군(靖國君)에 봉해 져 이성계를 호위하는 친위부대의 수장으로서 제 2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을 맞아 많은 무리들 이 시세(時勢)를 쫓아 모두 도망(逃亡)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용전(勇戰)하였으나 애석하게 도 운명(殞命)하고 말았으니 이후 자손들의 여한 (餘恨)이야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역사는 살 아있는 권력이고 권세 또한 권력을 잡은 자에 의 해 이루어지듯 그의 후손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없었던것이다. 그러나 반란(叛亂) 세력(勢力)에 맞서 반드시 왕을 지켜 왕권을 수호하고 반란군을 진압해야만 하는 그 길은 시세(時勢)를 쫓는 선택의 길이 아 니라 분명한 필연(必然)의 길이요 바로 충신(忠 臣)의길임에틀림이없었다할것이다. 정국군은 무신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로가 많았다.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재 직하던 때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왜구 선박 300여 척 을불태우고 개선하였다.이는우리나라해전사상 전무후한일로서이후로왜구의활동이전만큼활 발하지 못하였다. 특히 장군이 사용한 함포를 가 진 군함으로서는 세계사적 선구이며, 화포를 가 지고적의선단을행상에서격멸한사실은세계해 전사상 처음인 것이다. 즉 將軍께서 창제하신 당 시의잠수함은물론원초적수준에불과하였을것 으로 보이며 그 후 200년을 지난 임진왜란 때 이순 신 장군에 의하여 드디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해군 당국도 將軍께서 우리나라 해전사에 이룩하 신 빛나는 공적을 기려 1994년 한국형 잠수함 제 4 호를 븮박위함븯이라 명명하고 그 진수식을 거행하 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적 117호 경복궁에도 정국 군의 땀이 서려 있다. 정국군이 참찬문하부사(參 贊門下府使)로서 처음 경복궁(景福宮) 창건당시 총책임을맡은것이다. 경복궁 공사는 1393년[태조 2년] 1월에 궁성을 쌓을 터전을 간심(看審)하기 시작하여 2월에 총 책임자로 정국군(당시 참찬문하부사)이 임명되 고 문무 각품(文武各品)에게 쌓을 돌을 바치게 하 여진척되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정국군께서동 년에 일어난 밀성의 소경 이흥무 사건으로 그 직 을 물러났으며, 이 후 제1차 왕자의 亂으로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389년(정종 원년)에 재개 하여 1,426년[세종 8년] 10월에야 각 門과 다리의 이름이정하여졌다. 현존하는 경복궁은 정국군께서 총책임을 맡았 던 건물이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고종 2년(1,866 년) 4월 대왕대비(大王大妃)인 趙大妃에 의하여 본격적인 계획이 설정되어 고종 4년 11월에 완공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경복궁 의 뿌리가 정국군에 의하여 이어져 오고 있음을 상기해본다. 정국군은 아들 기(耆), 용(龍) 둘을 두었다. 장 남 기(耆)는 제1차 왕자의란(1,398년8월26일)으 로 아버지 정국군께서 서거하신 후 1,398년9월21 일에 前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유만 수(柳曼殊)將軍의 아들인 매형(妹弟)유연지(柳 衍之) 公 等 17名과 함께 사첩[謝貼] 및 전민[田 民]을 몰수당하고 외방부처는 면한 채 太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 가의대부 및 이조참 판 경연참찬관,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歷任하였 으나 1,417년(太宗 17년) 12월 9일 남양부사직에 서 파직(罷職)된 후의 기록은 이조실록에 존재하 지않는다.남양부사직에서罷職되기2년전인1,4 15년[太宗 15년 乙未] 8월 20일 사헌부에서 상소 한 내용을 보면 “亂臣의 子孫은 서용(敍用)을 하 지 말라고 하였는데 남은, 이근, 朴 쭈, 변 남 용 , 심 효생,유만수의아들이현달(顯達)한벼슬을두루 거치어 안팎에 퍼져 있으니 그 벼슬을 罷免 하소 서”라는 상소로 보아 當時 先生께서는 處身함이 相當히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되어진다.이후낙향 한 후 山水를 즐기면서 춘정(春亭) 변계량(卞季 良)과 더불어 밀양향헌(密陽鄕憲)을 창립하였으 며 그 밖 에 先 生 에 대 한 자 세 한 記 錄 은 남 아 있 지 않고, 일찍부터 文學으로서 名聲을 떨치었다는 기록만 밀주지(密州誌) 및 밀양 향선생안 밀주징 신록(密州徵信錄)등에 남아있을 뿐이다.차남 용 (龍)또한기록은전해지지 않고족보의기록에는 부사(府使) 영동정(令同正) 증(贈) 참판(參判) 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들 형제 중 장남 기 (耆)는 아들 대생(大生), 현생(賢生), 인생(仁 生), 효생(孝生)을 두면서 크게 번성해진다. 그러 나 차남 용(龍)은 아들 을생(乙生)을 두었으나 계 속하여독자로이어지면서그수는미미하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기(耆)의 장남 대생(大 生)은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 행(行)황해진병마 절도사, 차남 현생(賢生)은 좌리공신, 삼남 인생 (仁生)은 선무장군,사남 효생(孝生)은 야은 길재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세종조에 집현전에 들어 가고 박사(博士)로 세자를 가르쳤다. 이후 사직 (司直)에 오르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나 얼 마되지 않아당시의다변한시정(時政)에장차 큰 일이있을것을 짐작하여정사(政事)에 참여할 뜻 을 버리더니 급기야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물러나영월에유배되어생을마치니남 몰래 3년간 복제(服制)를 입었고 토굴 속에서 기 거하며 매년단종의기일(忌日)에산에 올라 종일 통곡하는 등 단종에 대한 충절을 보이며 자취를 감추었다. 12중조略史븣정국군파(靖國君 派) 신남서원-경남밀양시무안면정곡리 신남서원은1822년(순조22년) 충의백(忠義伯) 정국군(靖國君)박위장군과 조선초문신인이조참판(吏曹參判) 박기(朴耆)선 생부자를봉향(奉享)하는서원으로 장군의14世孫인숭덕전(崇德殿)참봉(핫 奉)기성(基聖)의주청으로 밀양사림(密陽士林) 의 공론으로 모아 하였으며 사당은 상모사(尙慕祠) 강당(講堂)은 경본당(景本堂)이라 편액하고 응교(應敎) 강세백 선생이 상향축문을지었으며향례(享禮)는仲春秋季丁日(2월,8월달 마지막 丁일)로 정행(定行)하였다. 그러나, 1868년서월철폐령 으로 훼철된후 강당을 경보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제실로 삼아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의식에 따라 향사를 받들어 왔었다. 그 후, 1981년후손들의발의와밀양유림의공의(公議)로 서원을복원하여상모사를그전대로 중건하였고1984년복원에따를 고유제를 올려 지난날의 서원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을 설치하여 신역(神 域)을구획하였고바깥에는강당인경보당이 있으며경내에박위장군과 박기선생의제단비가있다. 밀성박씨는 신라 말 경명왕의 적장자인 휘 언침(시조30세)이 밀양의 성주인 밀 성대군으로 봉작 되었기에 그 자손의본 관을밀성또는밀양으로하였다. 신남서원-경남밀양시무안면정곡리 신남서원은 1822년(순조22년) 충의백 (忠義伯)정국군(靖國君)박위장군과조 선초 문신인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기 (朴耆)선생 부자를 봉향(奉享)하는 서원 으로 장군의 14世孫인 숭덕전(崇德殿) 참봉(핫奉) 기성(基聖)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密陽士林)의공론으로모아하였으 며 사당은 상모사(尙慕祠) 강당(講堂)은 경본당(景本堂)이라 편액하고 응교(應 敎)강세백선생이상향축문을지었으며 향례(享禮)는 仲春秋季丁日(2월,8월달 마지막 丁일)로 정행(定行)하였다. 그러 나, 1868년 서월 철폐령으로 훼철된후 강당을 경보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제실 로 삼 아 후 손 들 에 의하 여 서 원 의식 에 따 라 향사를 받들어 왔었다. 그후, 1981년 후손들의발의와 밀양유림의공의(公議) 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를 그전대로 중건하였고 1984년 복원에따를 고유제 를 올 려 지 난 날 의 서 원 모 습 을 되 찾 게 되 었다. 현재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 면에 신문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 획하였고 바깥에는 강당인 경보당이 있 으며 경내에 박위 장군과 박기선생의제 단비가있다. 이후 후손들은 번성하여 파계를 형성하 고, 밀성(밀양)박씨 대종회는 12중조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12중조의명칭 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1742년(영 조18) 임술년에 발행(印刊)된 밀성박씨 연계대보(통칭 임술년보)에 수록된 ‘密 城朴氏 大君之后 12中祖 世系分派之圖’ 가처음등장한다.곧12중조를연계해서 세대를 표기한 창시보의 하나이기도 하 다. 12中祖를 보면 밀성대군으로부터 8 세에이르러태사공(太師公,휘彦孚),도 평의사공(都平議事公, 휘 彦祥), 복야공 (僕射公, 휘 彦仁), 밀직부사공(密直副使 公,휘良彦),판도판각공(判圖判閣公,휘 天翊),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乙 材), 10世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휘 元), 13世이 충헌공(忠憲公, 휘 陟), 영동 정공(令同正公, 휘 元光), 15世 밀직부원 군(密直府院君, 휘 中美), 정국군(靖國 君,휘 쭈), 16세 규정공(糾正公, 휘 鉉) 등 이다.이중태사공계는손자사문진사공, 6世충헌공,8世밀직부원군,9世규정공 이고, 밀직부사공계는 6세 영동정공, 삼 사좌윤공계는 8世 정국군으로 지난 호 삼사좌윤공파를 다룬바 있어 이번호 정 국군파를연재해보고자한다. 뱚정국군파연원(淵源) 박위장군영정 신남서원상모사제향광경-유림행사로 봉행되고있다. 평양성읍호루(북한 국보제1호) 박위함 김해분산성전경(사적제66호) 충의각(분산성내)분산성수축내력등을기록한 4개의비 석이 있다.靖國君朴公쭈 築城事蹟碑는왼쪽에서세번째 고종8년(1871)에세운것이다. 동래성인생문(부산시기념물 제5호) 동래읍성은1387년경상도도순문사정국군에의해축성된 성으로 인생문은 임진왜란에 이 門을 통해 피난간 사람은 모두목숨을건져‘사람을살린문’으로 전해지고있다. 뱚정국군파세계(世系) 뱚▶7면에 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