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page

2016년8월31일 수요일 5 (제116호) 관향조 종친회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부사(副 使)로 일본을 다녀온 운계공(雲溪 公) 박재(朴 켬)선생의 학술대회가 ‘충주의 조선 통신사’ 주제로 오는 1 1월 10일 충주시 주관으로 개최된 다.(장소미정) 이번학술대회는선생께서일본에 다녀오면서 저술한 책들이 국역으 로 번역되면서 우리나라 통신사에 관해 많은 연구와 토론이 이어질 전 망이다. 박재 선생은 고령(高靈)박씨 고양 대군 22세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 (文臣)이다. 1564년(명종19년)에 태 어나 1622년(광해군14년)에 59세로 별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 자헌대부(資 憲大夫)이조판서(吏曺判書)와 지경 연(知經延) 의금부(義禁府),춘추관 (春秋館) 홍문관(弘文館) 대제학 (大提學) 예문관(禮文館) 대제학 (大提學) 세자 좌빈객(世子 左賓客) 오위 도총부(五衛 都摠府) 도총관 (都摠管)에증직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서운리주봉산선영에있다. 선생께서 일본에 다녀오며 남긴 △동사일기(東 픕日記)는 1617년 일 본방문시 개인일기로 한양에서 출 발하면서 광해군을 배알하고 경기 도 광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안동 등지의 조상의 선영과 집안을 먫아 서 인사를 나누는 과정과 일본에서 의 일본의 지식인들과 필담으로 시 를 나 누 는 과 정 과 시 가 수 록 되 어 있 다.(현재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 △ 회답사일기(回答使日記)는 16 17년 일본방문기 조정 보고서 형태 의 일기 고령박씨 무숙공파 천포문 중 종손 집에 전해내려 오던 것을 19 80년 충남 천안 독립기년관에 기증 (현재는 독립기념관 소장) 2014년 고령박씨 문중과 충주문화원에서 합동으로번역발간하였다. △ 송박재봉사일본서첩(送朴 켬奉 使日本序帖)는 1617년 박재선생의 일본방문을 30인의 문인이 전송하 는 시(詩)와 서(序)를 역은 책(현재 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등이있다. 한편이번학술대회에는문중대표 로 패널 한분이 참여하여 ‘운계 선생 의일생과업적’을발표하게된다. /자료제공박정하고령박씨대종회사무총장 조선통신사운계박재선생학술발표회11월 예정 1617년(광해9)일본에다녀온후동사일기,회답사일기등저서남겨 조선통신사행차장면. 선비의 고장 전라도 장성 에 가면 필암서원이 있다. 하서김인후선생을모신서 원으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옛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조 때 어 떤 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무엇인 가?” 물었더니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물론 아름다운 소리는 많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아침마다밥짓는소 리와 다듬이질 소리가 듣기 에 좋았다. 그런데 그 많은 소리 중에 왜 글 읽는 소리가 그리 좋을까? 책을 눈으 로 읽 기 보 다 는 소 리 내 어 읽 으 면 글 뜻 이 저절로 심성으로 젖어들기 때문일 것이 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했던가! 옛 선비들은 종일 앉아서 글을 읽었다. 허리 를 곶 추 세 우 고 단 정 히 앉 아 책 한 권 을 천 번, 만 번 읽었다. 내가 책인지 책이 나인 지 모 를 경 지 에 들 어 야 다 음 단 계 로 나 아 갔다. 아아, 선비정신은 이렇게 잉태되는 것인가!글 읽는 마음이 선비의 마음이다. 노강 선생의 지도아래 선비들은 청아하 고낭랑한목청을돋우었다. 지난 8월 14일 오전 노강 박래호 선생 을 따라 발걸음을 광주시 북구 매곡동에 있는 ‘대사랑’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식과 양식이 혼합된 퓨전식당으로 제 법 손님들이 많았다. 바로 호경장학회 주 체로 장학금 전달이 진행되는 곳이다. 정 갈한 실내 분위기에 품격 있는 명소였다. 벌써 예약석 벽에는 호경장학금 전달을 축하하는 프랭카드가 걸려있었다. 노강 선생의 자녀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모여들었고, 장학생과 보호자들도 함께 한 자리였다.25명 쯤 되는 조촐한 모임이 었다. 호경장학회 박택열회장(금호중앙 중학교 한문교사)은 “7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을 기리기 위해 이런 자리 를 마련했으니 식사를 편안히 즐기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5월 8일 어버이날 에 박정국, 박라영 학생이 대학생이 되어 1차로 장학금을 받았으며,작년에 수혜자 인 문향고 김미연 학생은 순천대학교 사 범대학에 입학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 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시원한 맥주한잔으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장학생은 장성 문향 고 3학년인 강상훈군 과 광주 송원여고 안혜지 양이었다. 강상훈 군은 담임선생 님의 장학생 추천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 다고 하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부모님이 교회 장로님이셔서 참석하지 못하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왔다. 학급의 부반장으로 학교의 방송 일을 도맡아 하 는 성실한 학생이라는 담임선생님의 칭 찬이 있었다.음식을 골고루 잘 먹는 것으 로 보 아 원 만 한 성 격 을 지 닌 것 같 았 다 . 안혜지 양은 부친과 함께 왔는데 밝고 명 랑한 학생이었다. 식사 후에 시원한 매실 차와 커피를 손수 쟁반에 담아왔다. 시키 지 않아도 어른들에게 대접할 줄 아는 마 음을지녔다. 어느 정도 점심이 마무리 되자 장학금 전달식이 진행되었다. 벌써 4년째란다. 호경장학생 증서와 소정의 장학금이 전 달되고, 이어서 ‘호경장학생 약속’이라는 글을 두 학생이 읽었는데 참석하신 분들 의 깊은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회 장은 격려사에서 ‘그냥 받았으니 사회에 그냥 돌려주라’는 당부를 하였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장학금을 받았으니 나중에 사 회에 나가면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학생 이 되라는 격려였다.그는 ‘청렴긍정’,‘근 검호학’이라는 호경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길로 부 모에게 효도하고 어른 들에게 공경할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서 노강 선생 집안의 효제충신의 가풍을 이 웃과 사회에 향기로 전하려는 의도가 읽 혀진다. 숭의고 교사인 이상호 선생은 “보기 드문 장학회인 호경장학회가 꾸준 히 이어지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덕담 을 건넸다. 노강선생은 젊은 시절 안혜지 학생의 중조부댁에서 공부한 인연을 말 씀하시기도하였다. 우리는 부모님의 유산을 뜻있게 사용 하고자 군이나 시청에 아니면 학교에 장 학금으로 기탁하는 경우를 볼 수 있 다 . 그 것도 값있는 일이지만 가족장학회를 만 들어 형제간에 직접 운영해보는 것도 참 신선한 일이라는 것을 노강선생의 자녀 들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해마다 부모님 의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젊은이들에 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노력들이 어떤 결실로 돌아올 것인가! 꼭 풍성한 열매를 기약하는 것은 아닐 것이 다. ‘그냥 받았으니 그냥 주어라.’ 그것으 로 족하지 않은가!대나무 숲 사이로 청량 한바람이불어왔다. 선비정신선양하는호경장학금전달식 열려 노강선생집안의효제충신의가풍을이웃과사회에향기로전하려는뜻담겨 호경장학회 박택열 회장이 광주 송원여고 안혜지 학생에게 장 학증서와함께 장학금을전달하고있다. 노강 박래호 선생이 장학생을 격려하며 함께하 고있다. 충주박씨 찬성 공 이 하 후 손 들 에게는 많은 애 칭이 있다. ‘송나 라에는 부자삼소 (父子三蘇)가 있 고 동국(東國)에 는 형제삼박(兄 弟三朴)’이 있다 이는 찬성공(휘 지흥)과 두 아들 문간공(휘 상), 육봉공(휘 우)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충주박씨 ‘일가육문장(一家 六文章)’ 이는 위 삼부자와 눌재(訥齋) 상(祥)의 중자(仲子) 진사공 민중(進仕 공 敏中)과 육봉공(六峯公) 우(佑)의 두 아들 연파공 개(煙波公 慨)와 문충공 사 암 순(文忠公思庵 諱 淳)의 뛰어난 문장 으로 인해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 듯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울린 선조의 유묵을 찾아 3년의 인고(忍苦) 끝에 속 사암집(續思菴集)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발행된 속 사암집은 육봉공(휘 우)과 그의 두 아들 연파공(휘 개), 사암 공(휘 순)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방계 후 손인 판서공파 인근 前 회장(충북대학교 사범대학명예교수)에의해출간되었다. 인근 前 회장은 편집에 붙이는 글을 통 해 ‘사암공(휘 순)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임진왜란을 겪었고 직계손 도 없으신 어려운 여건으로 사암선생의 시, 문, 서 등 원고의 상당량을 잃게 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어 혹 한국문집총간 등 에서 낙수(落穗)를 주울 수 있기를 바라 면서 대학도서관을 3년여 넘게 섭렵하였 습니다. 그리고 육봉선생과 연파 선생에 관련된 시와 문 등도 찾아보았습니다.’라 고 전 해 흩 어 진 유 묵 을 찾 는 데 심 혈 을 기 울였음을 알 수 있다.또 선생들과 친밀하 게 교유하신 여러 선생의 문중을 방문하 여 관련 유시, 문 등을 힘닿는 대로 찾아 보았으나 성과가 미미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번 발행된 속 사암집은 역해 눌재집 에 실려 있는 육봉선생 시,서,부 등과 연 파선생의 시등에 새로 찾은 육봉 선생 관 련 시,서와,연파 선생 관련 시 등을 합하 여 육봉집과 그리고 연파집, 그리고 새로 찾은 사암선생의 유묵, 시, 서와 관련 시 등을담아편집하였다. 육봉공은 찬성공(휘 지흥)의 셋째아들 이다.휘는 우(祐),1510년 문과에 급제하 여 공조, 병조정랑 등 주요 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우승지, 남원부사, 도승 지, 성균관 대사성, 병조, 이조참의 한성 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를 역임하고 청 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사암 박순으로 인 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에 빛났으며, 아들 둘(휘 개, 순)을 두 었 는 데 장 남 휘 개 (漑 ) 의 호 (號 )는 연 파(煙波)이다. 향시(鄕試)에 두 군데를 보아 모두 장 원하여 성시(省試,향시에서 선발된 이들 을 예부에서 시험하는 제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엎어져 짓밟혀 죽었 다. 이를 보고 말하기를 “선비가 하나의 명예를 두고 다투느라 사람을 죽이고도 돌아볼 여가가 없는데 이르니 이는 인인 (仁人) 열사(烈士)가 나가는 곳이 아니 다.”라고 말하고 뒤돌아 돌아와 이때부터 과거를 사절하고 나주 고향에 복거(卜 居)하여 강호(江湖)에 거쳐하면서 낚시 질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아 일찍이 시 일 절을 짓고 읊으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 니/ 값을 따지면 황금도 헐 값이구나/ 벼 슬 나루에 매지 말거라/ 한 평생 푸른 바 다 마음이라」라고 하니 이 시가 굴러 구 중궁궐에 들어가게 되어 선조임금이 특 별이 어사에게 명하여 그가 숨어사는 곳 을 엿보니 거문고와 책이 방에 가득하고 정자는 강을 눌러 있는데 노쇠한 얼굴에 백발을 하고 그 틈에 쓰러져 평상에 엎드 리고 기대고 하며 바람을 향해 길게 읊조 리다가 별안간 아이 종을 불러 배를 젓게 하고 여울을 내려가 안개 낀 물결을 오르 내리며 해가 기울어도 돌아 갈 줄을 모르 는 것이었다. 어사가 본대로 복명하니 임 금이 말하기를 탄식하고 은명(恩命)이 여러 차례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 여 하루는 동생 사암공이 일찍이 경연에 들어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주재소월 (裝舟載素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의 싯 귀는 처사(處士)의 시가 아니오. 경이 나를 위하여 나오도록 권할 수 있겠오.” 하였다. 그 다음날 특명으로 한성참군을 제수하여 부득이 취임하여 잠깐 있다가 현감에 옮겼으며 통정대부에 가자되었 다. 육봉공의 차남 휘 순(淳)은 조선중기 의 문인 학자로 명종 8년(1553)에 정시문 과에 장원한 뒤 예문관전적을 시작으로 영의정을 15년간 역임하며 약 35년간 조 정에있었다. 그 러 나 사 암 공 은 외 동 딸 을 두 고 있 어 사위 이희간(李希幹)군수의 후손이 300 여년 간 외손봉사하다 철종 때 어명으로 문간공의 후손 이휴( 視休, 1806~1875)로 하여금 봉사손이 되게 하고 돈영부 부정 의벼슬을제수하였다. 충주박씨판서공파인근前회장속사암집(續思菴 集)펴내 선생의고결한시,서,문등을접하면서배우면배울수록흠숭하게되고더욱심취하기에 이르러 박인근편집븡발행인 2016년 8월1 4일 은산부원 군파 제주도 종친회에서는 청년회 주관 으로 하게 단 합대회를 개 최하였다. 아침 9시부 터 종 친 들 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접수를 마치고 1 0 시 에 개 회 전 준 비 된 자 리 가 꽉 찼 고, 약 300여명의 종친들이 모인 가 운데 박성기(입도17세)청년회장이 개회사를 하였으며, 이어 박철수(입 도15세)종친회장이 대회사를 하였 고, 박승준(입도15세)회관건립추진 위원장이축사를하였다. 박성기 청년회장은 개회사에서 유래 없이 무더운 날씨에도 많이 모 여주신 종친분 들에게 고마운 말씀 을 전 한 다 며 종 친 회 의 일 에 앞 장 서 서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니 종친회 에서도 청년회에게 많은 지원과 협 력을 당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준 비에 소홀함이 있을지도 모르나 너 그러이 이해하여주시고 오늘 하루 를 마음껏 즐기시기 바란다고 하였 다. 박철수종친회장은대회사에서올 해 족보발간도 여러 종친들의 염려 와 협력으로 마무리 되었고 우리 종 친회의 염원인 회관건립도 내년 3월 이면 완료가 될 터이니 모든 종친들 의 관심과 협조를 당부한다고 하였 다. 박승준회관건립추진위원장은축 사에서 족보 발간으로 늦어진 종친 회관 건립이 이제 본격적으로 추진 되고 있어서 내년 3월 준공 예정이 니 많은 종친께서 협심하여 獻誠碑 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하여주시 기를당부하였다. 개회식이 끝나고 어린이 놀이와 중.고등생 경기, 어른들의 경기 와 노래자랑등으로여흥을즐겼다. 낮 12시부터 한시간가량 만찬을 하였으며, 만찬이후 장기자랑과 경 품 추첨 등을 하며 종친간의 우애를 다지는시간을가졌다. 오후 4시에는 모든 행사를 마치고 산회를 하였으며 오는 8월 27일 실 시하는 입도조 묘역 벌초에 많은 종 친들이 참여하여 주시기를 당부하 였다. 밀성박씨은산부원군파의후손입 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430여년 전인 서기1580년경으로 입도조(入 島祖)는 신라 시조대왕의 51세이며, 밀성대군(휘 언침)후(后)은산부원 군 휘 영균(諱 永均)의 9세손 후신 (厚信)이다. 입도조 휘 후신(諱 厚信) 公은 약 관에 문과 급제하여 통훈대부 홍문 관 정자(通訓大夫 弘文館 正字)로 재직 중 세화(歲禍)의 참혹함을 지 켜보며 관직을 버리고 가솔(家率) 과 가재도구 등을 범선(帆船) 3척에 싣고 곽지포구로 입도 정자천(正字 川) 상류인 애월읍 어음2리 1744번 지주변에정착한다. 이후 제주도의 토착성씨 고(高)· 양(梁)·부(夫)씨의 세 성씨와 더불 어 살아오는 동안 후신(厚信)公의 후손들은 대대로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육성하는 선비의 가문으로, 지금은 남자후손 기준 약3,400여명 으로 번성 명문거족으로서의 기반 (基盤)을 갖추고 있다. 특히 븮은산회보 발간븯과 븮종친회 단합대회븯를 격년제로 실시하고 있 으며, 은산회보 제7호를 출간 배포 하였으며, 이를 통해 종원간 폭넓은 교류를 가지면서 종중을 크게 발전 시키기고 있어 제주도 타 성씨들의 집중조명을받기도한다. 한편 이날 대회는 남녀 노소 구분 없이 많은 종원들이 함께하였으며, 3代 가족이 대거 참여하면서 종친 회 미래 전망을 맑게 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었다는평이다. /자료제공박경도제주수산문중회장 밀성박씨은산부원군파제주도종친회 제4회종친단합대회성료 3代가함께하며종친회전망밝게해 박성기청년회장 행사에참석한 종원들이 준비된만찬을함께하며정담을나누고있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