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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8월31일 수요일 2 (제116호) 숭덕전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 위원장 박래식(010-7169-9140) △ 상근부위원장 박상범(016-481-6552, 국당공파) △ 부위원장 문림랑공파 박진식(010-2290-1889, 대구시)/ 난계공파 박진하(010-4907-6936, 옥천읍) 이요당공파 박희삼(010-5402-15 3 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 진 주 시 ) ○난계공파박원하(적명 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 니 단기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 존 될수있도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 족보상식에 밝은 어른들이 작고하면서 이번대동보가 마지막 족보가 될 우려 가있어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 바 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신라시조대왕의 숭덕비(崇德碑)가 있는 곳으로 비석은 1759년 세워지고 비각은 건립기문이 1762 년 지 어 진 것 으 로 보 아 1762년 건 립된 것 으 로 추 정 해 본다.이에 이번호에는 입비 사실과 건립기문을 통해시조대왕의숭성비건립에대해알아본다. ○ 비석 : 높이 3장(丈, 1丈=3.58m), 너비 1파(把 아름, 116㎝), 두께 포척(布尺) 1척7촌(寸,60.86 ㎝), 신 사 년 1 0 월 에 경 주 부 남 쪽 7 0 리 되 는 돌 을 치 술령서쪽기슭마등산(현울산광역시울주군범서 면 소재) 아래에서 떠왔다. 공사를 시작한 3개월이 되 도 록 비 석 을 각 (刻 )하 지 못 하 다 가 임 신 년 3 월 에 영변(寧邊) 석수(石手) 박용수(朴龍秀)가 스스로 좋은 돌을 얻어가지고 왔는데 돌무늬가 기이했다. 1 2 월 에 돌 을 운 반 하 여 계 유 년 2 월 능 ( 陵 ) 아 래 로 운반해갑술년정월에갈아서다듬었다. ○을해년10월비석을다깍았다. ○무인년12월비음기(碑陰記)를각했다. ○ 기묘년 정월 부윤 윤학동(尹學東)이 조정의 명 을 받 들 어 힘 을 다 해 개 두 석 (蓋 頭 石 )과 좌 판 석 (坐版石)을 능 아래로 운반해서 비석을 세우니, 29 일신해일이었다.(1759.12.29.) ○ 당초 부윤 황경원(黃慶源)이 빗돌을 드는 역 사를 하고, 또 마련하는 물력을 감영에 보고해 얻 어서 회감(會減)하였으며 부윤 김선행(金善行)은 승군(僧軍)을 청해 얻어(10읍에서 1천5백명)빗돌 을 운반했으며 부윤 홍익삼(洪益三)은 비석 깎는 일과 인부를 감독했다. 비각(碑閣)을 영건(營建) 할 때 부윤 홍양한(洪良漢)이 음식 등 물자를 넉넉 하게 도와주었으며 그 후 신사년 10월부터 기묘년 12월 일을 마칠 때까지를 전후해서 부윤의 공로가 지대했으니, 이 어찌 여러 박씨들이 감송(感頌)하 지않겠는가? 동경(東京:慶州)은 바로 성조(聖祖)께서 나라를 세운 터이다. 왕께서는 탄생하여 7세가 되자 어른 처럼 되시고 13세에 육부의 군장이 되셨다. 21년에 는 경성(京城)을 쌓고 29년에는 왕궁을 짓고 재위 61년에승하하셨다. 그때에는해가동쪽에뜨면 만물이 모두보고,그 덕을 말하자면 모든 별이 북극성을 감싸는 것 같고 모든 별이 북극성(北極星)을 감싸는 것 같고 <駐 모 든별은신하,북극성은임금을상징하는말로 신하가임금 을호위하는비유로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 자(孔子)의 말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 과 같았으며 세 성씨가 선양(禪讓)해 가며 1천년 국운을 누렸다. 당나라 무덕(武德) <駐 당고조(唐高 祖)의 연호(年號)> 초에 당고조가 뷺신라는 군자의 나 라이다뷻라고 하면서 신하의 예(禮)로 대하지 않았 다 고 한 것 은 모 두 성 조 께 서 후 손 에 게 남 기 신 모 책 과지극한덕이아님이없다고하겠다. 왕비 알영씨는 출생할 때 알영정의 용이 상서를 나타냈으며 자라서 성덕(聖德)이 있어 왕비로 삼 으니, 마치 하늘이 문왕을 탄생하고 또 태사를 낸 것과 같아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두 성인이라 고 부르니, 대아(大雅) <駐:시경(詩經) 구성(構成) 부분 의 하나, 대아와 소아(小雅)가 있다> 에서 이른바 뷺하늘 이 배위를 내니,받은 명이 굳게 되었다뷻라고 한 경 우가아니겠는가? 아,옛날 제왕에게 영원히 잊지못할덕이 있으면 반드시 영원히 높이 받들어 보답할 전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주(周)나라의 청묘(淸廟) <駐:본래는 주문왕(周文王)을 제사하는 사당인데 제왕(帝王)의 종묘(宗 廟)를뜻한다>는 문왕의 덕을 칭송하고 아울러 바삐 수고한 선비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요 비궁 ( 섟宮) <駐:종묘(宗廟)나 사당(祠堂), 신전(神殿)을 말한 다>은 노후가 수개(修改)한 일을 읊으면서 위로 강 원(姜嫄)과 후직(后稷) <駐 : 강원은 제곡(帝꺽 )의 아내 로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주(周)나라의 먼 조상 후직(后 稷)을낳았는데후직의이름이 기(棄)이다>까지 언급했으 며 상송(商頌)<駐:송(頌)은시경(詩經)의한 구성요소로 상(商)나라의사적을노래한 시이다>의 현조(玄鳥)와 장 발(長發) <駐:시경 상송(商頌)의 편명으로 현조편은 간적 (簡狄)이 제비(玄鳥)가 알을 낳은 것을 보고 먼시조 설(契)을 낳은 사적을 노래한 내용이며 장발은 상나라 선조들의 명덕 (明德)을노래한 시이다>에 이르러서도 역시 상(商)나 라 사람들이 그 소생을 서술하면서 천하를 소유한 처음까지 언급한 것이니,어찌 칠묘(七廟) <駐:제왕 (帝王)의 종묘(宗廟)> 에 서 만 그 덕 ( 德 )을 볼 수 있 는 것이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성조의 모책(謀策)과 공적(功績)은 위로 하(夏) 상(商) 주(周)를 계승 한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 없고, 아래로 한(漢) 당 (唐) 송(宋)나라에 비교해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 다. 다만 여러 차례 벽해상전(碧海桑田)의 변을 겪 어서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는데다가 중간에 세대 가교체된것이무릇몇번이어서장차시조왕의외 로운 분묘가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탄식을 면치못하게되었다.반드시주무왕같은성왕이나 온 연후에야 끊어진 것을 잇는 성덕(盛德)을 볼 수 있게되었다. 우리세종대왕은성스러움이주무왕과같아서전 대를 잇지 않고 비로소 묘전을 짓고 향축을 내려 제 사를 지내도록 하셨다. 그러다 불행하게도 임진왜 란이 일어나 전각 역시 불에 타버렸는데 앞서 수복 (守僕)박언수(朴彦秀)가 위판을 지고산속으로숨 어서백세부조묘 <駐:영원히대대로 제사를지내야하는 사당>의신주가다행이불길을피할수있었으니,기 한 일이다.마땅히 조서로 후세에 전하여 난리에 나 라를 등진 자들을 격려해야 하는데 아직껏 포상하 는전례가없으니탄식을이길수있겠는가? 지난 경종대왕 3년에 특별히 숭덕전이란 호를 내 리고 또 참봉을 두었으니,대개 미자(微子) <駐:미 자는 은(殷)나라 마지막 왕 주(紂)의 서형(庶兄)인데 주왕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나라를 떠난 산인(山人)의 하나. 이 내용은서경(書經)미자지명(微子之命)에나온다>의 ‘덕 (德)’은 이를 높이고 어짊을 닮은 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또 후손 유생 91 명을 정원으로 하여 번갈아가며 숙직을 하게 했으 니, 나라에서 숭봉하는 사체가 전에 비해 더욱 자 멸하다하겠으니어찌아름다운일이아니겠는가. 우리당저(當 콕) <駐:지금의임금을말한다>병인년 영부사 김상로(金尙魯)공이 영남을 안절(按節)할 때순찰하다계림에이르러친히붕괴된각능을살 펴보면서 능소를 범하여 경작한 미련한 백성들을 개탄하는 마음이 일어 비석 세우기를 청하고 지방 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봉심(奉審) <駐: 묘소나 전 각(殿閣) 등의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일>하는 일을 규정으 로 정하라고 하였으니,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 는데 본도에 계하(啓下) <駐: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 음>하자 부윤 정홍제(鄭弘濟) 공이 흉년이 들었다 고 영문(營門)에 보고해 즉시 거행하지 않으면서 6,7년이나 미루었으니 애석하게 명을 폐치(廢置) 한것이어찌이에이른단말인가? 아,성조의 자손 숫자가억만명뿐이아닌데서울 밖을 바라보면서 비록 이에 마음을 쓴 자가 바로 전 참봉 박태운(朴泰運)으로 홀로 걱정하고 탄식 하였지만영남의한한사(寒士)가어쩌겠는가? 천 리 먼 길 을 발 로 싸 메 고 서 울 로 가 서 객 지 밥 을 먹으며 여러 종인들에게 두루 의논하니,그 가운데 더러는 뜻을 같이 해 호응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 분 수수방관 하였다. 박태운이 스스로 일이 성공하 지 못하면 다시는 조령(鳥嶺)을 넘어 돌아가지 않 겠다고 생각하여 기갈(飢渴)한서(寒暑)를 따지지 않고 많은 세월을 허비해 소청(疏廳 ) <駐: 상소(上 疏)를 의논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을 설치했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종인들이 조금씩 찾아와 함께 궁궐에 나아가 호소할 의논을 하기도 했으나 지위가 높은 중신들은 혐의(嫌疑)하지 않아도 좋을 혐의를 핑 계대면서 소두(疏頭) <駐: 연명(聯名)으로 상소할때맨 먼저 이 름을 적는 사람> 를규피하였다. 신미년(1751년) 7월 22일에 고(故) 좌윤(左尹) 필정(弼正)이 당시 군직함을 띠고 있었는데 몸을 떨쳐 일어나 종인 수백 명이 서명한 상소문을 가지 고 궁궐로 가니,승정원에서 가로막고 상소문을 즉 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의 북백(北伯) <駐: 함경북도 관찰사 함경도를 말한다> 조명정(趙明 鼎) 공(公)이 경주부윤으로 있다가 갈려서 조정으 로 와 곧 승정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공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상소문을 받아주어 임 금께서 묘당(廟堂)에서 아뢰어 처리하라는 비답을 내렸다.그 당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경연(經 筵)에 나아가 아뢰니, 임금이 하나같이 모두 아뢴 대로윤허하셨다. 아, 상소하여 청하는 범절(凡節)이 얼마나 중요 한가? 그런데 븮왕(王)븯자로 고쳐야 하는 일 <駐: 신 주(神主)에 당초 ‘시조(始祖)라고 만 쓴 것을 시조왕(始祖王) 이라 고쳐 쓰는 일>을 아 주 오 래 끌 어 와 서 여 러 사 람 들의 억울해 하는데도 예조에서 예사로 보아 넘기 고있었다.그러다10년이후에야전의참봉박정원 과 박태운 등이 상언(上言)하여 계하(啓下)하였는 데 그때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서 예조의 복계(覆 啓)<駐: 해당관청에서임금께 다시외뢰는일>를 인 해 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해 신사년(176 1년) 10월 초3일에 경주부윤 홍양한(洪良漢)공이 조정의명을받들어위판을고쳐썼다. 아,성스러운조정의이번 일은천년에한번있는 일이다. 처음 빗돌을 캐어 크기에 맞추어 정(精)한 부분만남기고못쓸부분은버리어반드시미품(美 品)을 만든 후에야 그만 둔 자는 누구인가,부윤 황 경원(黃景源)공이요 이어서 승군(僧軍)을 동원해 서능아래로운반해갈고다듬은자는부윤김선행 (金善行) 홍익삼(洪益三) 공이 전후로 이어서 감 독한힘이었다. 아, 판서(判書)로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조관빈 (趙觀彬)이 비명(碑銘)을 짓고 지금의 봉조하(奉 朝賀) <駐: 종2품 이상의 관원이 치사(致仕)한 뒤 임명되 어 평생동안 나라의 큰 행사 등에 참여하는 명예직> 원임 (原任)영의정 유척기(兪拓基)공이 비액(碑額)의 전자(篆字)를 썼으며 전면의 글씨는 송도유수(松 都留守) 홍봉조(洪鳳祚) 공이 쓰고, 후면 글씨는 홍문관 수찬 박상철(朴相喆) 공이 썼다. 임금의 명 이 있은 후부터 일에 따라 지시하고 가르쳐서 잘못 이 없도록 한 분은 금성도위(錦城都尉) 박명원(朴 明源)과참판(參判)박상덕(朴相德)공이다. 아,비석을 새기다 보니 여러해가 바뀌어 기묘년 에 야 세 우 게 된 것 은 대 개 사 력 (事 力 ) 이 미 치 지 못 함을 연유해서이다. 원비(元碑) 가운데 뷺을해년에 세우다 븮乙亥立븯뷻이라는 석 자는 잘못이므로 고 (故) 우참찬 정익하(鄭益河) 공이 지은 음기(陰 記) 가운데서 이미 언급했다. 그 당시 비석을 세운 자는 도신(道臣) 조운규(趙運逵) 공과 부윤 윤학 동(尹學東)공이다. 아, 성조의 후손으로 영남을 구경한 자가 전후해 서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각릉을 봉심한 자가 하 나도 없어서 마침내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청 한 자는 마침내 김상국(金相國) 동당(同堂) 형제 가 혹 장계로 청하고 혹은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시작부터 끝까지 힘을 썼다. 그래서 귀부(龜趺)의 높다란 비석이 묘도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때에는 비태(否泰) <駐: 주역(周易)의 비괘(否卦)와 태괘(泰卦). 천지가교합하고만물이 통하는것을태괘라하고그렇지 못하여 폐색(閉塞)하는 것을 비괘라 한다. 세상 만사의 성 쇠(盛衰)와 운명의 순역(順逆)을 가르킨다>가 있고 일에 는기회(機會)가있어서그런것이아닌가? 아, 비각을 낙성한 것은 과연 누구의 공로인가? 들보와 기둥은 참으로 조래( 퉈徠)의 소나무와 신 포(新浦)의 잣나무 <駐:동량(棟梁)의 재목이 자라는 큰 산을뜻한다>로 고도(古都)에 사당이 완연하고 선도 산 아 래 낙 수 (落 水 ) 가 구 름 낀 산 이 공 읍 ( 拱 揖 )을 하고 있어 마치 하례를 올리는 듯하며 백신(百神) 이호위하며묵묵히보우(保佑)하는듯하다. 이제 다행이 이번에 부윤 홍양한(洪良漢) 공이 임금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다가 이곳 동쪽으로 부 임 해 왔 으 니 땅 은 성 조 께 서 나 라 를 처 음 연 곳 이 요 때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시대였다. 홍공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유적을 생각하여 늠료( 먹料)를 덜어 비용을 보태 양식을 축내지 않고 공사에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때를 넘기지 않고 공사 를마쳤다.그래서덕을기록하는높다란비석이풍 우에 씻기어 마모되는 것을 면하게 도이어 한 고을 의 덕행을 보게 되었으니, 이런 것이 이른바 전공 (前功)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각을 보수하 는일은한결같이숭인전숭의전두전각의절목에 의해서할것이니우려할일이무엇이겠는가? 다만 서운한 것은 나라의 숭봉(崇奉)이 이미 삼 각의 뜻을 따르고 또 두 전각의 의절(儀節)과 같게 하고있으니후손된자들은마땅히각별히십분삼 가고 조심해서 복구되지 못한 것을 복구해야 하는 데도전후일을맡은자들이봉행을잘하지못해많 은 물의(物議)를 빚고 있으며 전관의 추천 명단 역 시 지나친 폐단이 없지 않아서 공론이 분개함이 끝 이 없 다 . 대저 제사를 지내는 도리는 오로지 정성과 공경 이어서 븮시경(詩經)븯 대아(大雅) 생민편(生民篇) 에 보면 제사를 지내는 절차에 대해 갖추 말하면서 뷺반드시 혹 방아 찧고 절구에서 퍼내고, 쌀을 싹싹 씻으며 쪄서 김이 뭉게뭉게 오르며 거의 죄(罪)를 짓지말아야후회가없다뷻고끝맺었으니,원하건대 제사를 지낼 때에 엄숙하게 옷을 갖추어 입고 혹시 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서 반드시 영령께서 임해 계 시는 듯한 정성을 바쳐 혹시라도 전처럼 삼가지 않 고 불경(不敬)하여 오르내리는 영령께 죄를 짓는 일을하지말아야한다. 아, 원릉의 송백(松柏)을 엄히 수호하여 때때로 순시를 하여 살펴서 베지 못하도록 하기를 반드시 남국(南國)의 감당(甘棠) <駐: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편에 나오는 시로, 소공(召公)이 남쪽지방을 다스 리면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나자 그곳 백성들이 소공이 쉬었던 팥배나무(甘棠)를 베지 말라고 노래했다는 내용이 다> 처럼 하고 전각 옆의 대나무 숲을 더욱 아껴서 보호해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엄숙해야 할 지척의 땅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어찌 촉인(蜀人)들이 사당의 잣나무를 애호한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랴? 오늘날 서울의 여 러 종인들이 영외(嶺外) 여러 종인들에게 바라는 바역시이에서벗어나지않을것이다.지금부터전 관이 된 자가 반드시 전임 박정원(朴挺源)처럼 일 심으로 봉공(奉公)한다면 저의 잘못되어 부끄러움 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구구한 말들이 혹 후 세에 영원히 전해줄 감계(鑑戒)가 될지 모르겠다. 참봉 박수겸(朴守謙)이 비각의 역사를 할 때 부지 런히일했다는칭찬이있기에아울러언급한다. 아, 종인 박세욱은 송당(松堂)의 후손으로 사승 (史乘)을 참고하여 또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사재 (私 財 ) 를 털 어 방 금 인 쇄 에 부 처 간 행 하 면 서 책 이 름을 소원록이라 하여 성조의 신위(神偉)한 공렬 (功烈)이 사람들 이목에 빛이 나도록 널리 배포해 영원히 전할 계책을 도모하였으니,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고 하겠다. 생각하건대 나는 나이가 많고 글이 졸렬해서 누락됨이 많은데 어떻게 후세에 전 할 문자를 기술하겠는가? 산천이 아름답고 만물이 풍부함은여기에서논할겨를이없다. 후예(後裔) 정헌대부 전(前)행지중추부사 박치 화(朴致和)는 나이 83세에 기록하고 통덕랑 박경 (朴璟)은쓴다. 숭정 기원후 세 번째 임오년(1762년) 4월 일에 현판(懸板)하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숭덕비 편액좌측 숭정기원후三壬午라기록하고있어1762 년이다. 뱚입비(立碑)사실(事實) 숭성비 실제크기 ①400㎝.② 115㎝.③50㎝ ④175㎝ ⑤130 ㎝⑥280㎝ 신라시조대왕숭성비 뱚비각기(碑閣記) 비각기문(碑閣記文) CMYK